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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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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5년 1월호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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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가이드가 절대 아님

지난 14년 동안 말씀 묵상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여정에서 내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묵상의 체계를 갖추고자 다양한 방식을 모두 시도해 보았다. 다른 시간대와 다양한 활동으로 말씀 묵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러 성경 역본을 챙겨 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진다고 확신하며 말씀 묵상을 해내려고 애썼다. 한 시간 묵상하면 그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덤으로 복을 더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15분으로 줄어들거나 어떨 때 전혀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불쾌해하신다는 생각에 그날 하루는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감사하게도 성령은 고집스러운 내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그분의 성품만큼이나 변함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일로 그분의 사랑이 바뀔 리 없었다. 


이건 아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가장 완벽한 말씀 묵상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전형적인 장남이자 철저한 완벽주의자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수석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직업적으로 늘 최적의 해결책을 찾고 과정을 효율화하며 문제를 더 빨리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의 두뇌는 패턴을 찾고 시스템을 만들고 모든 것을 최적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심지어 한동안은 내가 말씀 묵상을 위한 최적의 방법을 알아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최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성경을 읽고 출근길에 기도하고 체육관에서는 설교를 들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기도 일지도 가지고 다니면서 응답받은 기도들을 적어서 내가 올바르게 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 했다. 

완벽한 말씀 묵상의 ‘공식’을 찾고자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성경 공부는 30분이면 충분할까? 60분이 필요할까? 짧은 구절에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긴 이야기들을 읽어야 할까? 기도는 언제 해야 할까? 말씀 묵상 전에 혹은 말씀 묵상을 끝내고 해야 할까? 얼마나 오래 해야 할까? 찬양은 어디에 넣으면 좋을까? 찬양을 불러야 할까? 아니면 듣기만 해야 할까? 자연 속에서 걸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그 일이 방해가 될까? 완벽한 세팅을 찾기만 하면 매일 고민할 필요 없이 그대로 반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마치 한 번 완성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영적 알고리즘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효과가 없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최적화하려고 애쓸수록 더 공허해졌다. 마치 시간을 계속 확인하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았다. 형식적으로는 함께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온전히 그곳에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님보다도 내가 정한 말씀 묵상 과정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 나는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려고 앉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기다리고 있는 업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기도의 시간을 재고 있는 자신을 보며 마치 하나님과 내가 오전 7시 30분에 끝내야 하는 비즈니스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말씀 묵상 시간에 온전히 있지 못하고 그저 있는 척할 뿐이었다.

엘렌 화잇은 이러한 현상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묘사했다. “기도 시간에도 하나님을 만나서 얻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들은 너무 조급하게 한다. 잰걸음으로 급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 그 거룩한 영역에서 잠시 쉬는 듯하지만 권고를 받으려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거룩한 교사와 함께 머물 여유가 없다. 그렇게 그들은 짐을 그대로 진 채 일터로 돌아간다.”1

나는 마지막 구절을 읽을 때마다 멈칫한다. “그들은 짐을 그대로 진 채 일터로 돌아간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반복하고 있는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결정해야 할 일들을 예수께 가져갔다가 다시 서둘러 그 짐을 짊어지고 다음 할 일로 바삐 향하지 않는가? 여러분도 나처럼 말씀 묵상의 바른 요소를 다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급함과 무관심이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관계 맺으시는 하나님

요즘 깨닫는 게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서둘러 끝낸다고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 또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에 따라 사랑을 주는 분이 아니다. 말씀 묵상을 서둘러 끝내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거두시는 게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만큼 내가 덜 인식하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이것은 마치 커튼을 드리운 방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해를 볼 수 없어도 빛나는 태양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따뜻하고 눈부신 그 빛은 우리가 시간을 들여 그 커튼을 걷어야만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가장 깨닫기 힘든 교훈인 듯싶다. 하나님은 성공해서 올라야 할 자리가 아니다. 최적화할 프로젝트도 아니고, 개선해야 할 습관도 아니다. 하나님은 관계를 맺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엘렌 화잇이 묘사한 세상을 살펴보자. “세계는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는 긴장 속으로 돌입하고 있다. 오락, 돈벌이, 권력 다툼, 생존 경쟁에 몸과 마음과 혼을 쏟아붓게 하는 무서운 세력이 있다.”2

나는 그 무서운 세력을 매일 느낀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마닐라의 학생으로서 학업과 신앙을 조율하려 애쓰고 있든 멕시코시티에 사는 어머니로서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기도 시간을 챙기려 하든 나이로비의 사업가로서 영적 우선순위를 유지하려 하든 그 “무서운 세력”은 우리 모두에게 작용한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즉각적인 답변과 빠른 해결책, 끝없는 최적화에 익숙하다. 우리의 영적 삶조차도 끊임없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앱처럼 여기면 늘 새로운 기능, 업데이트, 새 버전을 찾는다. 하지만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관계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결과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교제를 성급하게 해치우다 보면 갈수록 그 흔적이 남는다. 


마음이 서서히 굳어진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잠을 자도 피로감이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조급하게 하나님을 지나쳐 버려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능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분의 지혜가 흐려지지 않으며 그분의 평안은 늘 한결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물로 가는 길, 그분의 임재를 자각하는 일 그리고 그것들을 수용하는 능력은 우리의 조급함으로 크게 제한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으시다.


달성이 아니라 임재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붙드시며 은하의 움직임을 주관하시고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시는 하나님은 절대 서두르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서두르며 다니셨다는 기록은 없다. 모든 예언을 이루고 주변의 끊임없는 요구에 응하며 제자 열두 명을 훈련해 사역을 잇도록 그분께 주어진 시간은 3년 반뿐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꾸준히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멈추어 대화를 나누시고 방해하는 이들도 받아들이셨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의 성품에 관한 아름다운 일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깊은 계시이다. 그분의 느긋한 임재는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라는 초청이다. 긴 묵상으로 그분의 사랑을 획득하라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사랑을 지녔음을 깨달을 만큼 느긋해지라는 초청이다.

나는 더 나은 묵상을 위한 5단계 계획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방법들은 이미 충분히 시도해 보았고 답이 아님을 깨달았다. ‘더 나은’ 묵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달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내 삶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서두르지 않으려면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서둘러 끝내려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시간을 늘려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있을 때 오히려 하루를 더 잘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산하면서 끊임없이 최적화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시편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가만히 있음’이 ‘하나님 됨’을 아는 전제 조건임을 주목하라. 이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이것이 안식일이 나에게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우리는 쉬면서 그 쉼 가운데서 우리 하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또 우리가 결코 하나님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늘 아침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았다. 묵상 시간을 타이머로 재지 않고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 ‘필요한 만큼 이 자리에 있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시간은 참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는 할 일 목록, 다가오는 마감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모든 이유가 계속 떠올랐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이 시간을 측정하고 최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과 같이 또 다른 생산성 있는 활동으로 이 시간을 바꾸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잠잠히 기다렸다. 

그 느긋한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성경의 말씀이 더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기도는 암송이 아니라 대화처럼 변해 갔다. 단어들 사이의 침묵도 덜 불편해졌다.

내가 갑자기 더 영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늘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그리고 한결같은 그분의 임재가 변함없이 늘 진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한 번의 말씀 묵상 시간으로 나의 서두르는 성향이 없어진 척하지는 않겠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서두르지 않기로 선택할 때 무엇이 가능한지를 상기할 수 있었다.


덜하기가 더 필요할 때

아마 여러분도 서두르는 말씀 묵상에 지쳤을지 모른다. 짐을 다시 짊어진 채 일터로 돌아가며, 그분의 권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리스도의 사랑을 ‘패싱’ 하는 데 지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매일 많은 시간을 따로 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말씀 묵상을 늘 완벽하게 하거나 최적의 영적 알고리즘을 찾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주어진 시간을 우리가 오롯하게 맞이하면서 자기를 신뢰하며 잠잠히 머물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시간 속에 충분히 머물라고, 차분해질 때까지 자기를 완전히 신뢰하라고, 우리 속에 모든 것이 몰아칠 때도 자기를 기다리라고 하신다.

단지 자신에 ‘관한 것’을 알 뿐 아니라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돌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최적화하지 않는 시간 말이다.

세상은 여전히 미친 속도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도에 따라 돌 것인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달성에 감동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의존에 마음이 움직이신다. 내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최적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 통제하려는 시도였고 내 독립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진정한 교제란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최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물렁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이제야 내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진짜 일’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서두를수록 효율은 오히려 더 떨어진다. 하나님과 함께 진정으로 속도를 늦춘 날에는 마음이 더 맑아지고 결정은 더 지혜로워지며 일은 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내가 특별한 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려 했던 것을 드디어 받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더 많은 시간을 잠잠히 보내는데 오히려 더 생산적인 하루가 이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정확한 요점이다. 하나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맡기는 것 특별히 시간을 배가해 주신다.

통제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으라는 것, 이미 값없이 주어진 것을 획득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초청일 것이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실제로 손에 쥐고 있는 존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급한 말씀 묵상은 시간 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신뢰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달성하려는 충동과 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사이에 있는 불편한 영역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와 만나시려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 미친 듯한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따로 나와서 자기와 교제하도록 초청하신다. 그분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분의 힘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힘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진리들을 깨달아 우리 삶이 변화되도록 하려는 초청이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신다. 그분은 결코 그러신 적이 없다. 그분은 그저 여러분과 나를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1 엘렌 G. 화잇, 『교육』, 260


2 앞의 책



캘리 부루차라 수석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며 미국 버지니아주 뉴마켓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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