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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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아직 한겨울이다. 새해 첫 달인 1월 달력을 넘기니 ‘봄’이라고, ‘입춘(立春)’이라고 쓰여 있다. 바깥은 여전히 동장군이 혹독한 추위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눈으로 먼저 맞은 봄>은 반갑기 그지없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저만치서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비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있고,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때로는 계절이 교훈을 준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인생에도 겨울이라는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화창한 봄날이 올 거라고. 그런데 막상 고독한 시련의 겨울을 지날 때면 “내 삶은 계절이 아니야.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올까?”라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지곤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계절이 변하고 또 변하듯이, 인생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날들도 있지만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의 삶도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은 없다. 식상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걷기 편한 길만 걷는 게 아니라 저마다 삶에서 거친 시련의 길을 걸어야만 할 때도 있다. 다만 자기에게 닥쳐온 시련과 고난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행복한 삶이 될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다.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삶에 시련과 고난이 이르러 왔을 때 이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버티기 힘든 순간이 있겠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서 인내하면 삶에 새로운 국면을 접하게 될 때가 참 많다. 『후한서(後漢書)』에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야 강한 풀(勁草)을 분별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강한 풀인지 약한 풀인지 구별이 안 된다. 하지만 세찬 바람이 몰아치면 강한 풀은 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니, 인생에 질풍(疾風)이 몰아쳐 와도 인내하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기회를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말이다. 성경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기 위해 모의했고, 요셉을 각별하게 사랑했던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자, 그를 죽여 한구덩이에 던지고…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창세기 37장 20절)며 서로 입을 맞추려 했다. 맏형의 제안으로 요셉은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져 죽음은 면했지만 여전히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곳에서 형들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낙담과 좌절이 그를 압도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구덩이에 빠졌지만 그곳에서 위를 보았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다른 형제 유다가 이집트로 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한 채,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이방 땅에서 노예로서 그의 앞에 있는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 내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성실한 삶을 살았으며 결국 이집트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신발이 없다”고 불평했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독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해럴드 애벗(Harald Abbott)과 알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다. 애벗은 예전에 데일 카네기의 매니저 역할을 했었다. 하루는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카네기는 애벗에게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애벗은 자기가 몇 해 전에 경험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한번은 거리를 걷다가 제 걱정을 싹 없애 주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10초 사이에 저는 인생을 사는 방법에 대해 그 이전 10년 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동네에서 2년째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저축한 돈을 다 날렸을 뿐 아니라 새로 대출받은 돈을 앞으로 7년 동안 갚아야 했습니다. 결국 며칠 전에 저는 저의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고는 캔자스시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신감과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길 건너편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는 롤러스케이트 바퀴를 단 작은 나무판 위에 앉아서 양손에 쥔 나무막대로 땅을 밀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본 건 그 사람이 거리를 건너 인도와 보도 사이에 있는 얕은 턱을 넘기 위해 몸을 들려고 애를 쓰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나무판을 기울이는 순간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더군요. ‘안녕하세요? 정말 날씨 좋죠?’라며 활기 넘치게 말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그를 보는데 ‘나는 정말 부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두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은행에서 적은 액수의 대출을 받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 많은 액수를 요청할 만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혹시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 캔자스시에 가 보려 한다고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캔자스시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밝힐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원하는 만큼의 대출을 받았고, 일자리도 구했습니다.”라며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어서 “요즘 저는 화장실 거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붙여 놓고 매일 아침 면도를 할 때마다 읽고 있습니다.”
나는 우울했다네. 신발이 없어서…
거리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I had the blues because I had no shoes
until upon the street I met a man
who had no feet.
- 박재만 시조사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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