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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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 가운데 ‘봄하다’ ‘여름하다’ ‘겨울하다’는 없어도 ‘가을하다’라는 단어가 있다. ‘가을하다’는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온 산야가 울긋불긋 곱게 단풍이 들면,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와 이를 보며 크게 감탄한다. 이때 사람들은 가을다운 모습을 강조하며 “이곳 경치가 아주 가을가을한데?”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가을하다’의 본뜻은 농부가 가을 들판의 가을걷이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한자어로 농작물을 수확(收穫)한다고 할 때 이때도 ‘거둘 수(收)’, ‘거둘 확(穫)’을 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가을은 달리 말해 “뿌린 것을 거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계절이다.
가을은 지난날의 노력을 돌아보는 때
‘가을하다’ 즉 ‘거둔다’는 것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가뭄과 홍수를 이겨 내고 결실을 거두기까지 땀 흘려 수고한 농부의 노력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가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지난날 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보면,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일을 그때그때 하지 않았을 경우 나중에 후회하게 될 10가지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1)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 2) 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한다. 3) 젊어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4)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 5) 재산이 풍족할 때 아껴 쓰지 않으면 가난해진 뒤에 후회한다. 6)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 7) 담장을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도둑 맞은 뒤에 후회한다. 8) 절제하지 않으면 병든 뒤에 후회한다. 9) 술에 취해 허튼소리를 하면 술이 깬 뒤에 후회한다. 10)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후회한다. 중국 송나라 때 대학자였던 주자(朱子, 1130~1200)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봄에 씨를 뿌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가을이 왔을 때 들판에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가을이 되어 들판에 거두어야 할 많은 수확물이 있다는 것은 그 농부가 지난날 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척도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때를 놓치면 추수할 시기에 빈손으로 그저 빈들만 멍하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을은 들판에서 수고의 성취를 보는 때
가을은 들판에서 농부가 수고한 결과와 성취를 보게 되는 때이다. 농부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은 지난날 그가 얼마나 힘겨운 시간들을 지내 왔는지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풍성한 볏단을 한 아름 안고서 기쁨에 겨워하는 농부의 얼굴에 띤 환한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임에 틀림없다. 가을이 되면 농부는 신이 난다. 그는 들판에 가득한 수확물을 거두고 또 거둔다. 온종일 허리를 숙이고 작물을 거두느라 허리 통증이 심해도 아픈 줄 모른다. 온종일 팔을 뻗어 과실을 거두느라 팔이 저리고 아파도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농부는 자기 손으로 손수 가꾸어 온 작물을 건둥그리며 행복에 겨운 웃음을 멈출 줄 모른다. 가을은 농부가 들판에서 힘써 온 일들에 대한 성취를 보는 때이다.
가을은 들판에서 수확의 풍요를 누리는 때
가을은 농부가 들판에 가득한 농작물을 추수하며 그 풍요를 누리는 때이다. 지난 계절에 부지런히 일한 농부는 가을에 그 풍요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가을은 거두는 시기이다. 농부에게 수확할 것이 없는 빈들은 고통이다. 비단 농부만이 아니다. 작은 텃밭을 일구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가을은 제 모든 결실을 내어 준다. 영어 속담 가운데 “바람이 없다면 노를 저어라!(If there is no wind, row!)”라는 말이 있다. 망망대해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노를 저어서라도 가라!”는 뜻이다. 농부가 그렇듯이 이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일 때 마침내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마침내 수확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가을은 들판을 비우는 때
가을걷이를 마치면 가을 들판은 어느새 빈들이 된다. 가을은 겨울맞이를 위해 정리하고 준비하는 때이다. 텅 빈 들판은 일견 쓸쓸해 보이지만 들판도 쉼이 필요하다. 들판은 농부에게 모든 걸 다 내어 주고 겨우내 긴 호흡(?)으로 쉼을 얻는다. 11월은 한 해를 슬슬 마무리하는 때이다. 11월은 지난 한 해 동안 조급한 마음으로 너무 급한 호흡을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기 좋은 때이다. 지금은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돌아보며 서서히 거두기 시작하는 때이다. 여전히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두 손으로 움켜쥐려고만 했다면 지금은 하나둘 내려놓고 마음을 정리하고 가지런히 모을 때이다. 가을은 지친 몸뿐 아니라 무거운 마음, 힘든 마음, 상처받은 마음에 쉼을 주어야 할 때이다. 지금은 가을할 때이다.
우리! 가을할까요?
- 박재만 시조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