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가까이 나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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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중 잉태된 날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인생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된 사람은 야곱밖에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살이였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복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집요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축복을 얻고자 형 에서를 따돌리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아냈습니다(창 27장). 그에게 약속된 축복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재물의 부요뿐 아니라 열국의 주가 되는 명예가 주어졌습니다. 그에 더해 28장 13~15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직접 약속받습니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 평생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만사형통의 큰 복은 다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이 130년을 살고 난 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남긴 말이 참 기가 막힙니다. 그가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 바로를 만나서 건넨 말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는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개역)자기의 일생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살이
그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와 생이별했습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어머니와 잠시만 못 볼 줄 알고 헤어졌지만 이후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겠습니까? 또 결혼 첫날부터 신부가 뒤바뀌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후에는 본의 아니게 아내를 넷이나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일으키는 갈등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여러분! 처가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창세기 31장 40절에서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것, 이것이 바로 저의 형편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생스러운 처가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또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4명의 아내 중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노상에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것입니다.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이런 일을 당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동딸 디나가 세겜성에 들어갔다가 추장 아들에게 성폭행당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뿐 아니라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빌하와 불륜 관계를 맺어서 집안이 뒤집힙니다.
그리고 한동안 평안한듯 하더니 갑자기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터집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야곱이 받았는지(창 37:33~35), 얼마나 오랫동안 애통했는지 모릅니다. 또 7년 대기근이 몰아닥칩니다. 그런 고통이 끝나자 인생의 황혼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애굽 땅으로 이민을 떠나는 야곱의 뒷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돌 하나를 베개로 삼고
우리 중에 아무리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야곱처럼 온갖 험한 꼴을 골고루 겪으면서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진정 나그네살이 인생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0~11절은 이러한 야곱의 파란만장한 떠돌이 인생의 시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그는 지금 들판에서 야숙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생각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였다는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두려운 앞날을 이제 그는 홀로 헤쳐 가야 합니다. 준비 없이 급히 집을 떠난 야곱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천막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룻밤의 잠을 위해 주변의 돌 하나를 취해 베개로 삼고 잠을 청한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런데 바로 그날 하나님은 돌베개를 베고 자는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경이로운 방식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사닥다리[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사닥다리[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11~13절).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심경이 우울할 때, 죄짓고 괴로워할 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리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짓고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사다리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숨길 수 없는 많은 허물을 가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가장 경이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바로 야곱의 인생에서는 위기 때마다, 고난의 순간마다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에서의 인생에서는 이런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나그네살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인생에는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하는 즐거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야곱은 떠돌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을 지녔어도 그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향한 간절한 호소가 있었습니다. 심령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엘렌 화잇은 그날 밤 야곱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절망의 어두움이 영혼을 억눌러 그는 기도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심히 외로워서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보호의 필요를 느꼈다. 깊은 겸비로 눈물을 흘리며 그는 자신의 죄를 자복했고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다는 어떤 증거를 간청하였다”(부조, 18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자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비천한 한 인간의 운명을 방치하지 않고 동행을 약속하시며 스스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이날 밤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복된 약속의 광주리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13~15절).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얻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평생 함께하시겠다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그네살이에는 늘 고난이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떠돌이 인생에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요 유일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이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보시고, 이들을 고난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상심한 인간을 향한 ‘격려’입니다. 상처받은 영혼의 ‘위로’입니다. 절망한 심령을 위한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세면서도 낙망하지 않는 까닭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주옥같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 일
이제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16절). 그리고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17절).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18~19절, 개역). 거룩한 두려움과 한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야곱은 베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단을 쌓기 시작합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자신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 제단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인격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경건해져 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라 애덤스라는 분이 쓴 찬송시가 하나 있습니다. <내 주께 가까이 나가는 일>이라는 찬미입니다(462장). 세라 애덤스는 빼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지닌 배우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공연 중에 쓰러졌고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사실 폐결핵은 그녀의 가족력이었습니다. 5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언니도 같은 병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였습니다.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연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애덤스는 윌리엄 폭스 목사를 도와서 찬송가 편집 작업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1840년 어느 날 그는 창세기를 읽다가 오늘의 본문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야곱의 어려움이 자신의 상황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 폐병으로 돌아가신 엄마, 연기자로서의 갈등, 질병과 싸운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이런 삶이, 형의 복수를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야 했던 야곱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린 애덤스는 찬송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Nearer, My God, to Thee…내 주께 가까이 나가는 일, 십자가 짐처럼 고생되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시를 쓴 지 8년 후 43세의 젊은 나이로 애덤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 찬송은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깨어나 돌단을 쌓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일은 그분이 먼저 사다리를 들고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것과 같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녕 나그네살이 인생입니다.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 눈 붙였다가 떠나는 것 같은 인생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지 않는다고 보장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재물이 좀 있어도, 자식들이 좀 잘되는 것 같아도, 좀 건강해도, 험악한 세월을 살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살면 얼마나 잘살고,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한가요?
그런데 그 고달픈 인생길을 가면서도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세속적인 복을 누리고 살았지만,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비록 험악한 세월을 보냈어도 의미 없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슬픔과 괴로움 속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개역)라고 기록합니다. 야곱은 임종의 자리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축복받은 한 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며 지팡이에 의지해 그분께 경배하며 숨을 거둔 것입니다. 어려움을 많이 당해도 그는 결코 낙심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황량한 벌판에서 외로이 야숙하는 야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생에도 여전히 임합니다. 위기와 고난의 시간, 낙담과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구원의 사다리를 들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엄습한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돌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생 소원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일이 되도록 합시다.
꿈에도 소원이,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일이 되도록 합시다.
- 김윤배 삼육대학교 담임목사, 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