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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바리톤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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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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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의 삶이 세상에 인정받는 위대한 ‘작품’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장 좋은 도구들을 골라 내 인생의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탈리아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마치 명장이 그려 나가듯 아주 멋지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먼 훗날 그림이 완성되어 명작으로 기억될 순간을 상상하며 매일 열정을 다해 그려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을 쏟아붓던 내 소중한 캔버스 한쪽이 쭉 찢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성악가인 남편을 만나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믿음 좋고,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은 결혼 후 이탈리아로 오자마자 상을 휩쓸고, 본격 데뷔를 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역사적인 공간에서 콧대 높은 유럽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일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었다. 나는 남편의 세계 무대 진출을 위해 매니저, 홍보부장 역할을 자처하며 오페라 세계에 푹 빠져 살았다. 물론 밀라노 현지 교회에서 남편은 ‘찬양대’를 이끌며 신앙생활도 열심이었다. 하님의 축복으로 사랑스러운 아들까지 주셔서 우리 세 식구는 누가 봐도 행복하고 예쁜 가족이었다. 


2020년 초, 코로나19가 창궐했고 한국을 거쳐 이탈리아가 최대 타격을 맞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든 공연은 취소되고, 우리가 살던 도시는 봉쇄령이 내려졌다. 이탈리아 정부가 인정하는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특히 언론에서는 연일 이탈리아 최악의 사건들만 쏟아내고 있었다.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자국민들을 위해 전세기를 보내 준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고민 끝에 당시 만 3살이던 아이와 나만 한국으로 잠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한두 달이면 다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사실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기 하루 전날 나는 둘째 아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와 무사히 한국에 입국해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남편은 내심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임신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다시 이탈리아로 들어갈 시기를 고민하며 떨어져 지낸 지 5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9월 초, 이탈리아 새 학년이 시작되는 시기. 한국에 나와 있는 아이를 대신해 유치원에 다녀온 내용을 궁금해할 남편에게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화면 속 남편의 모습이 이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첨엔 전화기가 잘못되었나 싶어 끊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자세히 들여다보니 남편의 한쪽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악!”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전화기를 놓쳐 버렸다. 


‘뭐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무슨 일인 거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우선 앞집에 사는 이탈리아 이웃에게 연락을 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 빨리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다행히 남편은 그 전화를 받아 주었고, 나는 제발 정신을 잃지 말라고 소리치며 기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급대원들이 들어오고 남편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그저 5인치 작은 화면 너머로 바라만 봐야 했다. 그렇게 실려 가는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차로 인해 한국은 이미 새벽을 훌쩍 넘긴 시간, 눈을 감아도 남편의 잔상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밤새 피가 마르는 듯한 고통을 집어삼키며 제발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다. 다음 날, 응급 시술도 잘 끝나고 남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5개월간 밀라노에서 혼자 지내던 남편은 원인 미상의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골든타임을 훌쩍 넘기고 12시간 이상 홀로 쓰러져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전조 증상 따윈 없었다. 워낙 건강했고, 운동도 좋아했다. 몸이 악기인 가수들은 자기 관리가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런 남편이 왜? 뇌경색이라니.


차가운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남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배 속의 아기와 엄마바라기 꼬맹이가 곁에 있으니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빨리 남편을 보러 가야 했다. 세 살배기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이틀 뒤 남편을 보러 가기 위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19로 하늘길은 막혀 있었고, 난 임신 7개월 차였다. PCR검사, 격리, 임신부건강확인증 등 각종 서류 준비와 복잡한 절차를 뚫고 기적적으로 4일 만에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 


남편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마주한 남편은 우측 편마비, 실어증, 삼킴장애, 인지기능상실 등으로 겨우 내가 누구인지 정도만 아는 눈치였다. 일어서는 것은커녕 앉아 있지도 못했고,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 아이의 사진을 보고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누워 있는 남편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입으로 밥을 먹고, 가족을 알아보고,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기를 기도했으며, 인지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제발 단 한마디라도 해 주기를 그리고 배 속의 아이가 건강하기를 기도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임신부로서 편안히 쉬고 보호받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목놓아 펑펑 울고 싶었지만 태아를 생각하면 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덕분이었을까? 울고 싶을 때 더 웃고, 좌절보다는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우리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셨다. 기도의 응답이 시작된 것이다.



-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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