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소리 따라 걸었던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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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신학생 시절 1학년 때 교회사를 가르치는 오만규 교수님의 ‘재림교회 신앙 양심과 군 복무의 역사’라는 세미나를 들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안식일 준수로 어려움을 당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집총 거부로 곤욕을 치른 일에 대해서는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이 군은 아직 신학생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으니 내 강의도 더 듣고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에 가는 것이 좋겠다.” 교수님의 제안으로 2학년까지 마치고 입대 전에 방위산업체 지원 자격증, 굴삭기 운전기능사 자격증을 반년 정도 준비했고 결국 굴삭기 자격증을 취득해 육군에 지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집총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충돌
2004년 가을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크레인 운전 주특기를 받아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5주 교육을 받았다. 중대장의 허락으로 안식일 오전에는 훈육실에서 혼자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영내 훈련소 교회에서 오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제식, 구급법, 화생방, 사격·총검술, 각개전투, 행군 등 많은 훈련이 있었지만, 사격과 총검술 훈련을 받으며 마음이 부담스러워졌다.
‘회전하는 총탄이 몸에 박히면 앞에는 작은 구멍이 생기지만 뒤에는 상처가 커져 거의 사망한다.’라는 설명과 총검술 훈련 때 ‘적의 심장을 향해 찔러라’라는 교관의 외침이 ‘신앙 양심과 군 복무’에 대해 예민해진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재림 청년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할 신학도가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받는 것이 합당한가?’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이 져야 할 병역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성경의 가르침이 마음속에서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아 이동하면서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미 집총 훈련을 받았는데 자대에서 집총 거부를 해야 할까?’, ‘집총이 신체적으로는 큰 부담은 없는데 굳이 집총 거부로 소란을 피워야 할까?’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왜 선택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부대에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은 더해 갔다. 틈틈이 생각을 정리해 중대장께 드릴 말씀을 미리 편지지에 기록했다.
관심사병
자대인 수송 중대에 도착해 중대장을 만났고 안식일 준수와 집총 거부에 관해 미리 작성한 편지를 배낭에서 꺼내 전달했다. 중대장은 글을 찬찬히 읽었다.
“안식일 교인이냐? 부대에 적응 잘하면 안식일은 지키게 해주겠다만 집총은 해야 한다. 총기 수여식과 사격 훈련도 하고 행군 시 총기도 챙겨야 한다. 수송 중대라 훈련이 많지는 않아도 다른 병사들처럼 모두 받아야 한다.” 중대장은 건조하게 말했다.
일주일 뒤 아침, 중대원들 앞에서 총기 수여식을 진행했고 중대장은 “이병 이경훈, 앞으로” 나를 부르고 총기 번호를 읽고 총기를 수여했다.
“이병 이경훈, 저는 개인 신앙 양심에 따라 총기를 받지 않겠습니다.”
“들어가. 이따 중대장실로 와.”
중대장실에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인서를 썼다. 그날부터 간부 6명과 면담을 했다. 면담할수록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간부들끼리 말이 엇갈리는 것을 보고 내가 선택한 가치를 고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의무병, 공병, 취사병 등 다양한 비전투병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집총 훈련이 꼭 필요하지는 않겠다 싶었다. 국가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의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하며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한 생각을 중대장께 말씀드렸지만, 중대장은 현재의 제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두 번째 총기 수여식이 진행됐고 두 번째 자인서를 작성했다. 이튿날 중대장은 부대의 사기와 질서 문제를 들어 헌병대에 연락했고 나는 헌병대 영창으로 가게 되었다.
세 번의 재판
헌병대에서 부사관은 집총 훈련을 받기로 하면 돌려보내 주겠다고 거듭 회유했다. 어머니도 오셔서 집총 거부하면 교도소 간다고 하니 집총 거부하지 말라고 울면서 애원하셨다. 기약 없이 영창에 있으면서 마음이 괴로웠다. ‘총기 훈련이 별것 아닌데 괜한 고집을 부리나?’ ‘군대에 있으면 몸이 조금 불편하듯 마음이 조금 불편한 것도 잠시 참으면 되는데….’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길이 없다고 가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생각이고 옳은 일이면 해야 한다. 타협하지 말자. 내가 가고 다른 사람이 또 가면 길이 생긴다. 뒤에 오는 사람이 좀 편하도록 이 길을 계속 가보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창에서 한 달이 지날 무렵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군 검사는 1년 6개월 형을 구형했다. 군 판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할 기회를 주었다. 신학생으로서의 신분, 집총 거부를 하게 된 과정과 사유를 설명하며 신앙 양심에 따라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군 판사는 현 제도에서는 집총 하지 않고는 군 복무를 할 수 없다며 1년 6개월형을 언도했다. 재판이 끝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군 복무를 하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교도소로 가게 되어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판에 참석하신 부모님과 신학과 교수님께서 위로해 주셨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다음날 장호원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 육군교도소(현 국군 교도소로)에서 부사관은 항소 여부를 선택하라고 했다. 어차피 선택한 길, 다음 사람을 위해 이 길을 더 가보기로 했다. 항소심과 상고심까지 10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고 결과는 1심 재판과 같았다. 상고심이 끝나고 미결수에서 기결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군에서는 전역 처리가 되었다.
2주 정도 지난 후 김천교도소(현 김천소년교도소)로 이감됐다. 추운 겨울과 수감자들 사이의 갈등을 견뎌 내고 2006년 5월에 출소했다. 육군교도소에서 전역 처리될 때까지 12개월, 김천교도소 수감 기간 6개월, 총 1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군에 입대해 육군훈련소, 자대, 영창, 육군교도소, 김천교도소를 거치는 동안 마음은 힘들었지만 감사하게도 단 한 번도 구타당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지켜주었고 많은 교우님이 관심을 기울여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교회에 감사드린다.
2005년 추운 겨울 김천교도소에서 얼음물에 샤워하고 골방에 6명이 칼잠을 자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화목한 가정과 안정적인 직장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이다. 또 그 시절의 경험은 내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해 주었다.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복음 사명과 생명 신학에 따른 교회의 좋은 전통들이 잘 이어져 청년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에 유익이 되길 바라고 또한 기도한다.
*일반 직장에서는 입대일에서 전역일까지 복무한 기간을 군 경력으로 인정하며, 재림교회 기관에서는 신앙 문제로 인한 교도소 복역 기간도 포함하여 군 경력으로 인정해 주는 규정이 있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초본에 빨간 줄은 없다.
- 이경훈 에덴요양병원 에버그린센터 시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