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예배와 예배 공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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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신교의 예배당 개념 이해하기
2. 개신교 종교 권력 이해하기
3. 19세기 미국 개신교 종교 권력화와 예배 공간 변화
신적 소명이라는 신앙 고백과는 별개로, 예나 오늘이나 사회 속에서 개신교 목회자의 지위는 신이 부과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합의하여 부여한 목회 전문가로서의 자격이다. 직업 전문성을 토대로 한 것이 만인 제사장 인식의 진정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전문 직업군으로서의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신적 부르심을 주장하며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극복해 가야 한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 교회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요구에 대해 종교 전문가로서의 섬김을 제공해 나갈 때 존속할 수 있다.
성직주의는 기성 제도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옹호하는 가톨릭 이데올로기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기 때문에 비록 그 목회자가 범죄 전력이 있거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한들 크게 문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가톨릭의 화체설에 버금갈 정도로 목회자와 설교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맹신이 자리한다.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목회자는 설교로, 말씀의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을 끊임없이 제기하게 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신학 서적에 삼킨 바 된 목회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책은 구원이 아니다. 화체설의 오용이 가톨릭 성직주의의 뿌리를 건드렸듯이, 개신교를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한 데에는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능력 강박이 큰 영향을 주었다. 즉 설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사역이지만 우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개신교 설교의 의미와 역할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 설교의 의미와 역할
사도 요한은 성육신의 사건을 말씀(로고스)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하는 것(요 1:1, 14)이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변화하는 한계적인 몸, 즉 콘텍스트 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의 올바른 해석 혹은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필요가 교회에 줄곧 강조된다. 그렇다면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은 언어 자체의 정확한 의미를 기반으로 하는 것일까? 원어의 뉘앙스나 용례를 적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도 바울이 다본 기사는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 ‘19세기 미국 개신교 종교 권력화에 따른 예배 공간 변화 연구’의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서신에 대해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석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핵심은 언어의 의미나 뉘앙스를 넘어서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때만, 즉 몸이라는 연약하고 한계적인 공간에서 연약하고 한계적인 사람들과 함께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울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편지를 썼다. 로고스는 대중에게 들리고 대중이 처한 상황에 공명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설교란 나의 언어와 사유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것으로, 그저 천상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말을 낭독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 머물 때 언어가 허위 의식이 되고 땅에 발을 딛지 못한다. 말씀이 현재의 삶과 의식을 반영하지 못하면 문자 자체에 머물 뿐이다. 어쩌면 진정한 위기는 말씀에 대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말씀(텍스트)이 사람들의 삶의 문맥(콘텍스트)에 연결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텍스트의 경전성을 과도하게 강조할수록 오늘 현실의 언어로 우리와 함께하는 로고스를 제한할 수 있다. 텍스트에 집착할수록 성경과 사람, 사회를 협소하게 바라보기 쉽기 때문이다. 대중의 언어생활과 유리된 채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설교단의 언어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말씀의 가치와 존경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믿으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다. 그런 성경이라면 믿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그건 이미 우상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이 무시되고 사회의 상식이 말씀의 권위에 의해 외면당한다면, 말씀이 우상이 되어 교회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우상이 되어 교회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말씀, 신성 속에 갇힌 말씀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 오히려 텍스트를 읽어 나가지 못하고 텍스트에 삼켜진 것이다.
대중의 언어생활과 유리된 채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설교단의 언어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말씀의 가치와 존경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설교와 종교 권력
설교를 통해 종교 권력을 획득한 목회자들이 빠지는 성직주의는 불안증에 취약한 현대의 신자들에게 잘못된 형태의 종교에 휩쓸릴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금이 간 목사가 더 좋지 않으냐!” 이단 교주의 궤변이 아니라 성범죄 전력으로 유죄 판결받은 정통 교회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 했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넋 놓고 ‘아멘’ 한다면 이미 그 목회자와 신자들의 관계는 권력관계로 왜곡된 것이다. 마조히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할 우상을 찾아다닌다. 상처받아도 또 다른 구원자를 향해 나아간다. 문제는 그 구원자가 항상 성육신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교회를 돌며 구원자를 찾는 그들은 자신을 진실한 구도자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정신질환자에 가까울 수 있다. 자아를 사회의 맥락 속에서 제대로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치료를 받아야만 궁극적인 구원의 길을 향해서도 나아갈 수 있다.
목회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목회자가 성직주의의 부작용을 예방하고 목회의 길에서 탈진하지 않고 건전한 목회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목회 준비 시기나 초기부터 정서 관리가 중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관적 생각에 함몰되어 객관화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목회는 구약의 레위인이나 가톨릭 사제와 같은 성직이 아니다.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 특별한 신분이 아니다. 또한 현대 교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목회자나 일반 신자 모두 이 사실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성직주의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야 한다. 마르티 루터가 주장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 사상을 회복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한 외부에서 제기하는 반성직주의(목회 무능주의)의 도전에 맞설 수 없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특별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특별함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서서히 구조 변화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림교회 안에서 가톨릭 성직주의(혹은 목회자 의존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제도 교회나 목회자 제도는 교회 공동체가 합의한 시대적 산물이다. 그러나 여기에 가능성의 역설이 존재한다. 이 인간의 제도가 불완전하므로 다시 개혁하면 된다. 성직주의의 구도를 깨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성령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