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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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과 같았던 우리 삶의 공간에 이후로 몇 집이 더 이사를 왔다. 나는 내가 받았던 사랑의 밥상을 기억하여 몇 번을 차렸다. 후에 여러 번의 밥상을 차려 보았지만 그때 받았던 그 감동을 다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랑받음이 사랑을 주는 원동력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을 받은 경험을 가진 자가 사랑을 베푼다. 사랑받음이 마음에 채워질 때 사랑이 흘러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대가 없이 받은 작은 선물이나 말은 내 마음에 사랑을 채운다. 또한 나도 남에게 이 기쁨을 주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를 일깨운다. 내가 무언가 사랑의 행동과 말을 한다면 먼저 사랑을 받았음이 있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성경 말씀이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올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아!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을 주셨다. 사회와 주변을 둘러보며 사랑 고픈 이들의 모습을 본다. 사랑 고픈 이들의 모습은 상대를 찌르고 비난하고 거친 행동과 말을 드러낸다. 나의 눈에 사랑이 고파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인다. ‘누가 이들을 먹이고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 본다. 먼저 사랑을 경험한 이들을 통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실망스럽고 슬프며 아픈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나는 해답을 성경에서 찾았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후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아픔으로 밤이 새도록 고기를 낚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처럼 배는 텅 비었다. 어둠이 밀려가는 새벽녘, 해변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배를 채워 주신다. 이후 제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받은 사랑을 전하였다.
사회 분위기가 많이 변하였다. 혼밥족을 향한 마케팅이 호황을 누린다. 현실을 보면 어쩔 수 없음에도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상 하나에 거창하지 않은 반찬과 밥을 두고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었던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혼밥의 상은 달갑지 않다. 가족을 식구라고도 부른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쁜 사회로 이제 그 단어가 희미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언제부터인가 매식, 외식의 문화가 친숙해지고 있다. 어머니나 아내의 헌신으로 차려지는 밥상을 이성적으로 성평등으로 불합리함을 호소하는 문화가 내게 어색하고 아쉬움은 나이가 든 때문이기도 하고 사랑의 밥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덧 신앙생활 안에서도 허물없이 집으로의 식사 초대가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아름답고 좋은 유산이 사라져 가는 듯 아쉽다. 조금은 냉랭하고 불편한 이들에게 정성 담은 한 끼의 밥상을 차려 줘 보자. 한 끼의 밥은 힘이 세다. 내가 경험하여 먹어 보았고 차려 주어 보았다. 밥은 정말 힘이 세다. 나는 소망해 본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한 끼의 밥상을 차려 내는 마음을 늘 가질 수 있기를, 거창하지 않아도 언제든 나의 한 끼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초청하는 사람이 되기를.한 끼의 밥상, 그 밥상은 힘이 세다.
- 윤점순 영문학 전공, 주부, 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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