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박인 못과 옷에 박힌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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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목수다.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듯 공부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워서 목공방에 취업한 지 9개월째. 목수가 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 이름을 떨치고 싶은 본능적인 야망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첫 숙소는 컨테이너였다. 목공방 건물 뒤편의 컨테이너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아들의 짐을 같이 나르려고 했더니 아들이 나를 막아서면서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와서 숙소를 보면 울 것 같다고. 집 같지도 않은 곳에 사는 아들이 더 가슴이 아플까, 집 같지도 않은 곳에 아들을 두고 가는 내가 더 가슴이 아플까.
목회 처음 나와서 교회 옥탑방에 살던 때가 생각났다. 수십 년 전, 그런 집도 감사했던 시절, 부모님도 목회자의 집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계셨지만 와 보셨을 때의 애써 감추신 착잡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아들과 저녁을 먹고 숙소에 데려다주고 가려는데 사장님이 보이셔서 인사를 드렸더니 혈통이 무지 좋아 보이는 큰 개의 목줄을 잡은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치지 않도록 잘 돌보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목공이 위험한 일이구나. 그렇지. 무거운 나무를 재단하고 다듬기 위해 여러 장비와 도구들을 사용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어.’ 하고 느껴졌다. 나는 아들이 해야 할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눈과 코로 쏠리는 눈물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삼켰다.
그때부터 매일의 기도는 ‘오늘도 무사히!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였다. 처음엔 엄마로서 쉬운 것을 시켜 주시는 사장님이 감사했으나 아들은 매일 쉬운 일을 반복하면서 지겨워했다. 그러던 차에 선배 기술자의 퇴사로 제법 목수다운 일들에 차츰 투입되었다. 아들은 신나 했고 일은 힘들지만 재밌다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일에 익숙해지면서 아들이 금세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즈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책상머리 공부가 아니라 실제 생활을 통해서 느낀 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질문에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은 나는 답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다정하게 명쾌한 답을 말해 주었다. “아빠한테 물어봐!”
아들이 집에 올 때면 아들의 손과 팔을 구석구석 살폈다. 군대에서 막 전역했을 때는 운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취업 후 9개월이 지난 지금 살이 10킬로그램이 빠졌고 손바닥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굳은살은 종류가 달랐다. 운동할 때 생기는 굳은살은 체력과 외모를 위해 생긴 것이고, 일하면서 생긴 손에 박인 딱딱한 못은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웠지만 엄마의 가슴엔 아프게 박혀서 쉽게 만질 수가 없었다.
아들을 기차역까지 데려다주면서 한 손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처음엔 굳은살도 부드러웠던 것 같은데 이젠 제법 원래 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못이 박인 아들의 손은 험한 일을 해 본 적 없이 늙어 버리기만 한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예수님 손의 못자국이 생각났다. 나 때문에 생긴 예수님 손의 못자국. 내가 아들 손바닥 마디마디에 박인 못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듯이 내가 직접 예수님 손의 못자국을 보고 만진다면 순간순간 가슴 아파하고 내 죄를 회개할 수 있을까?
한번은 아들이 주말에 빨래를 적당히 가지고 왔다. 옷은 전부 어두운 계열. 하다못해 속옷도 어두운 계열. 흰 양말 딱 한 켤레. 세탁기를 돌리려고 했더니 아들이 황급히 자신의 옷에는 나무 가시가 많아서 다른 옷과 함께 돌리면 안 된다고 했다. 티와 속옷의 개수로 보아 사나흘치 옷이었다.
주머니가 네 개 있는 반바지를 들었는데 묵직했다. ‘반바지인데 뭐가 이렇게 무겁지? 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기에.’ 하며 살펴보니 일단 허리띠 버클이 되게 무거웠다. 그 허리띠에 걸었던 것인지 등산용 카라비너 클립에 줄자가 달려 있었다. 다른 주머니에는 필기류 하나, 또 다른 주머니에는 약통 하나, 마지막 주머니에는 주머니칼 하나가 들어 있었다.
몇 가지의 사연은 이러하다. 칠칠치 못해 줄자를 자주 잃어버려서 줄자를 아예 허리띠에 차고 일한다고 했다. 약은 웬 거냐고 했더니 팔꿈치 주변에 염증이 생겨서 약을 먹는다고 했다.
빨래를 널면서 옷가지에 가시가 얼마나 박혔는지 보니 다른 옷가지는 대충 다 떨어진 것 같았으나 두꺼운 양말을 뒤집어 보니 겉보다 속에 나무 가시가 더 많았다. 아들에게 양말 빨 때 뒤집어서 가시 제거해야겠다 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몰랐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아들의 자세도 많이 쓰는 손 쪽으로 어깨가 심하게 기울어 있었다. 걸음걸이도 이상했다.
마음이 좀 아팠다.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되기 시작해서 아직도 엄마가 되고 있었다. 내리사랑으로 엄마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없는 사랑도 퐁퐁 샘솟는다. 아니,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사랑이 터진다. 그러나 부모님께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부모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늠해 보게 된다. 그러나 과연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사랑을 정말 알 수 있을까?
나는 주중에 자녀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걱정 없이 잊고 산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내가 한시도 보이지 않을 때가 없기에 나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깊고도 넓은 것일까? 나도 자녀들이 24시간 눈에 보이면 자녀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또 넘칠까?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손에 못이 박이고 옷가지에 가시가 박힌 때가 있었겠지. 예수님은 그걸 보시는 게 애가 닳아서 시시때때로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특별히 내 아들의 손에 박인 못과 옷가지에 박힌 가시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 걸까? 과연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자녀들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 가고 있는 걸까?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영원히 공부한다는데, 이 땅에서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느껴지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신기한데 하늘나라에 가서 배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놀라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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