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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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4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다니던 회사 임원들과 함께 동해 쪽으로 출장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서울을 빠져나왔습니다. 겨우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에 진입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한번도 졸음운전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참고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야지.’ 생각했습니다. 따뜻한 봄날, 점심 먹고 얼마나 졸린 시간입니까? 그런데 세 명이 타고 있었는데 셋 다 잠이 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잠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이 딱 떠졌습니다. 순간 내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핸들을 꽉 움켜 잡았는데 우리 차가 5톤 트럭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에서 얼마 동안 졸음운전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차를 급하게 세우고 고속도로 갓길에서 사고 처리를 했습니다. 그날은 결국 회의 참석을 못했습니다. 졸다가 정말 다른 곳에 갈 뻔한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자다가 진짜 잠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며 삽니다.
왜 무당이 일상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2024년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파묘>입니다. 이 영화는 영혼 불멸과 강신술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음과 양, 과학과 미신, 바로 그 상이에 있는 사람.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라는 선언적 독백으로 이 영화는 시작합니다. MZ 무당 화림은 평소엔 프랑스 의류 브랜드 르메르의 옷을 차려입습니다. 포르쉐에 기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헬스장에서 스피닝을 합니다. 유행하는 가시번 헤어스타일을 하고 마셜 스피커를 틀고는 콘서트 같은 굿판을 벌입니다.
왜 무당이 일상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영혼불멸설과 강신술이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영혼은 살아서 산 사람들의 일상 속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 영혼 불멸 사상이 이미 일상의 공기처럼 되어 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일상의 자리에서 굿판이 벌어져도 이제 어색함이 없는 시대에 성경의 견해는 무엇인지 들어 봅시다.
지옥에 관한 세 가지 주요 견해
영혼의 불멸과 관련된 설명을 위해서 지옥에 관한 세 가지 견해를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 견해(끝없는 고통으로서의 지옥 불)입니다. 전통적으로 지옥은 악인들이 불멸하는 영혼으로 영원히 고통 속에서 형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집니다. 다수의 개신교인이 믿는 교리입니다. 이 견해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멸이라는 전제를 갖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의와 영생의 길을 추구하든지 악과 영원한 형벌의 길을 추구하든지 상관없이 불멸하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했던 최초의 신학자가 테르툴리아누스(155~222)였습니다.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신학이 플라톤의 견해를 수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즉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가 만나 생긴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회복주의적 견해(궁극적으로 모든 자를 정결케 하여 구원하는 지옥 불)입니다. 이 견해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것입니다. 회복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악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결과적으로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는 지옥 불이 이들을 정결케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은 지옥의 맹렬한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이기심 없는 사랑을 점차 깨닫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은 악과 죄로부터 회복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들을 보편구원론자, 만인구원론자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조건적 견해(철회할 수 없이 완전히 소멸하는 불 못)가 있습니다. 이 사상은 지옥이 영원히 불에 타는 기간이 아니라 그 효과가 영원하다고 믿는 조건적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불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로만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악인의 최종적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계속해서 영원한 지옥 불에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됨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멸절론을 가르칩니다. 이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불멸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불멸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며,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성경적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단 불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그분의 순수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행사한다는 조건에 달려 있는 조건적 영혼 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영생의 부활이나 영멸의 부활을 기다리는 잠 또는 무덤 속에서 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특별히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전통적 견해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고 믿는데 아마도 이것이 그분들에게는 위로가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천국 대신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을까요?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죄인을 끝없는 형벌로 고통받게 한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전통적인 견해 대신에 조건적 영혼 불멸 혹은 멸절 교리를 가르치는 개신교 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울 신학의 대가 F. F. 브루스, 개신교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존 스토트, 가장 대중적으로 기독교 신학을 전파하는 니콜라스 톰 라이트, 영혼 불멸에 관한 가장 중요한 논문을 쓴 장로교 신학자 오스카 쿨만 등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오랜 시간 가르쳐 온 전통과 교인들의 관성화된 인식 때문에 전통적 견해를 유지할 뿐 조건적 영혼 불멸을 믿는 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요청합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마 9:18). 예수님은 절박한 고백과 요청에 응답하여 그 집으로 향합니다. 이미 장례식 분위기로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절).
신약 성경에는 죽음을 가리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코이마스하이(생리적 잠과 죽음 두 가지의 의미)와 카데우돈(죽음과 상관없는 생리적 잠만을 의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죽음과 상관없는 생리적 잠을 뜻하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여기 이 본문은 신의 치유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신의 진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신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생리적 잠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죽었든 지금 죽든 그리고 나중에 죽든 상관없이 불멸의 손길이 닿으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멸하시는 그리스도의 손길을 기다리며 그분의 집 안(지옥이나 천국이 아닌 이 세상)에서 편히 잠자고 있다고 말입니다(살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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