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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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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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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중2가 되었다. 아들은 그 무섭다는 중2병에 걸렸다. 어릴 적 ‘톰과 제리’ 만화를 보여 주면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고양이 톰이 불쌍하다면서 울먹이며 보기 싫다고 하던, 저래 가지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되던 순하디 순하던 순둥이 아들이었다. 그러나 중2가 된 아들은 맹수가 되었다. 아침에 잠을 깨울 때마다 아들은 으르렁거렸다. 무슨 말만 하면 야생의 눈빛으로 변했다. 형제고 엄마고 아빠고 아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고, 맞불 작전으로 성질도 내보고, 선물 공세로 당근책도 써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백약이 무효했다. 꼴 보기 싫은 건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통화하거나 문자를 할 때 보면 어쩜 그리 다정하고 친절하고 자상한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다가 이름을 부르면 얼굴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정색을 한 얼굴로 삐딱하게 대답했다. “왜요?”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시작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기도의 자리를 찾는다. 벽에 부딪혀야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의 본능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살다 보면 모두가 한 번쯤은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는 배우지 않아도 기도가 터져 나온다.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기도를 올리게 된다. 가족을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대기실에서 기다려 본 사람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예기치 않게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었던 사람도 역시 수긍할 것이다. 하다못해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막히는 도로에 갇히거나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 헤맸던 사람 역시 공감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여러 요직을 맡았던 이항복이 쓴 책 『백사집』에는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출정 전에 남겼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절박한 순간에 터져 나온 가장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자주 하늘을 언급한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하늘의 도우심을 감사하기도 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도 한다. 기도는 인간이 배우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기도에 욕심이 개입되면 기도가 혼탁해진다. 기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기도를 요술 램프의 지니를 불러내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지니는 램프를 소유한 자의 소원을 들어준다.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지니는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소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준다. 도덕적 기준이나 윤리적인 고려는 전혀 없다. 소원의 성취가 가져올 파급력과 영향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소원을 비는 사람은 그저 램프를 소유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떤 소원이든지 빌 수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요술 램프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액면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교회는 나치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고, 일본기독교단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여겼다. 우리의 안목은 너무나 좁고 근시안적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완전하신 계획 속에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드렸던 수많은 기도가 내 뜻대로 성취되었더라면 이 세상은 또 내 인생과 우리 가족은 얼마나 불행해졌을 것인가?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생애의 빛, 93).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의 정의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자를 변화시킨다. 상황을 바꾸기 전에 나를 바꾸는 것이다. 나는 아들이 바뀌길 기도했다. 아들이 말 잘 듣고, 유순하며, 아빠를 존경하는 아이로 바뀌길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반항하지 않고, 성질부리지 않는 아들로 바꿔 주시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신약 성경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 이미 아들은 그 곁에서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땅을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들은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즉시로 아들을 고쳐 주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 가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께는 이 부자(父子)에게 더 주시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믿음의 결핍을 보게 되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그 후에 예수님은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들과 믿음 없는 아버지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더 좋은 해결책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을 바꾸고자 한다. 내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수월하고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아들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이전의 유순한 모습으로 바뀌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더 명확하게 보기 시작했다. 아들이 짜증 부리는 것, 성질내는 것, 좌충우돌하며 가족들과 부딪히는 것,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는 것,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빠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가정에서 왕처럼 굴고 있었다. 아들뿐만 아니라 나도 맹수처럼 살고 있었다. 이제 아들은 성장했고, 두 맹수가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기도 속에서 나는 내 자신과 아들을 더 분명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하면서 나는 왕좌에서 내려왔다. 아들에게 왕좌를 내어 준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왕좌를 내어 드렸다. 내가 아들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했다. 아들의 인생을 어떻게 해 줄 능력도 내게는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아들은 아빠의 의지에 굴복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였다. 나는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개입해 주시기를 그리고 아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요즘 아들은 많이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를 걷고 있다. 감사한 것은 기도를 통해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 간다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의 거센 바람과 감정의 노한 파도를 더 잘 보게 되었다. 이제는 이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는 방법도 경험적으로 배워 가고 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도 진리가 됨을 경험하였다. 나는 오늘도 기도하며 배우고 있다. 이 기도의 학교에 여러분을 초청한다.



​이재진 ​구리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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