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 T. 존스는 어떻게 빗나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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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 태생인 앨런조 트레비어 존스(Alonzo Trevier Jones, 1850-1923년)는 1890년대 재림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배도하였다. 존스는 1874년 워싱턴 주의 포트 왈라 왈라(Fort Walla Walla)에서 육군하사로 복무하던 동안에 침례를 받고 재림교인이 되었다.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그는 곧 태평양 북서 지역에 교회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1885년에 그는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와 <사바쓰 센티넬>(종교자유 잡지)의 편집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로 그는 E. J. 왜거너와 깊은 사귐을 갖게 되었다.
<싸인즈> 사에서 일하는 몇 년 동안 그와 왜거너는 재림교회와 구원의 계획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진보적인 개념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존스는 종교 자유의 영역에서 교단의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종교 자유의 주제는 1880년대에 일요일 법안 논쟁이 가열되기 시작하면서 상원의원 H. W, 블레어가 국가적 일요일 법안을 미국 상원 앞에 제시한 1888년 5월에 정점에 이른 이래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예언 해석에 관한 존스의 관심은 결국 그를 당시 교단에서 그 분야의 인정받는 전문가였던 유라이어 스미쓰와 갈등 관계로 이끌어 갔다. 그들의 갈등의 발단은 다니엘 7장의 열 뿔의 정체에 관한 상이한 견해와 관련되었다. 그리하여 1888년 대총회 회기에 갈등이 불거졌다. 그 중대한 회기로 말미암아 존스는 대총회 지도부와의 힘이 부치는 투쟁에서 E. J. 왜거너와 연루된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는 그 회기에서 종교 자유문제에 기여했지만, 그와 왜거너의 주요 기여는 구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드높인 데 있었다.
엘렌 화잇은 서부 출신의 이 청년들에게 교단이 반드시 들어야 할 구원에 관한 기별이 있음을 인식하고 적어도 1887년부터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전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그녀는 1888년 회기 동안에 그들 편에 섰고, 그 후 1889년과 1890년대 초에 북미를 횡단하며 재림교회에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을 전할 때도 그들과 함께했다. 1888년 이후 몇 년 동안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반항을 보고 엘렌 화잇은 재림교인들에게 주께서 존스 형제에게 “매우 귀중한 기별”(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을 주셨다는 것을 거듭거듭 일깨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존스와 왜거너의 가르침이 “무오하다”든지 그녀 자신이 그들이 전하는 모든 것에 동의한다고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원치도 않았다(Ms 56, 1890; 참조 Ms 15, 1888).
1880년대 말과 1890년대 초에 존스가 미국 의회 앞에 제시된 국가적 일요일 법안의 연례 결산을 공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재림교인들의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의회의 다양한 위원회 앞에 교단을 대표하여 여러 번 등장했는데, 그 첫 번째는 1888년 12월 13일에 있었다.
존스와 왜거너는 대총회 회기들에 특별 강사로서 급부상하여, 1890년대 동안 그들의 우세를 유지했다. 예컨대, 존스는 1893년 회기에 24번, 1895년 회기에 26번 설교했다. 1894년 초에 엘렌 화잇은 많은 이들이 존스와 그의 사상을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었다고 거듭거듭 개탄했다(Lt 27, 1894; Lt 6a, 1894). 그의 지위가 얼마나 격상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상징은, 1894년 교단의 지도자들이 당시 교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 가운데 하나인 <리뷰 앤드 헤럴드> 편집장으로 존경받던 유라이어 스미쓰의 자리를 존스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존스는 애나 라이스(Anna Rice)의 거짓 예언적 주장들에 동조함으로써(심지어는 1893년 대총회 회기에 그녀의 글들을 통해서 늦은 비를 불러오려는 데까지 나아감) 자신에게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1897년에 그가 편집장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고 스미쓰는 부편집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더 나이든 사람에게 정말 굴욕적인 일이었다.
존스의 신학은 1890년대 초에 변질되었다. 1893년에는 어느 정도 그리고 1895년에는 훨씬 더 강하게, 존스와 왜거너는 구원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인간의 인성과 한 점도 다름없이 똑같다는 개념을 두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르침이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에도 없진 않았으나 두드러지진 않았다. 그러나 1895년에 이르러 그런 가르침은 존스의 신학에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해에 그는 그 주제와 관련하여 6개의 대총회 설교 대부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닌 것을 포함하여 모든 점에서 인류와 꼭 같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존스는 거기서, 청중 가운데서 제시한 엘렌 화잇의 인용문,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형제이지만 같은 성정을 지닌 것에서는 형제가 아니다.”라는 진술에 대답해야 했다. 존스는 그 도전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와 같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와 같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참조 1895 GCB 231, 233, 327). 그 대답으로 존스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던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입증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그와 왜거너는 마침내 1950년대에 범교단적인 논쟁을 야기할 가르침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1890년대에 존스는 종교 자유, 예언 해석, 교회 조직, 신유 등에 관하여 극단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그의 몇몇 해석은 엘렌 화잇으로부터 직접적인 질책과 좀 더 온건한 권면을 받았다.
18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엘렌 화잇은 호주에 있었다. 그 기간에 미국에서의 그녀의 주대변인은 존스였다. 거듭거듭 그녀는 담대한 존스에게 제멋대로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시할 증언을 보냈는데, 그가 가장 힘든 상황에도 맞설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불행이지만, 그녀는 동시에 그가 그녀의 말에다 자신의 말을 섞어 그녀의 의도를 부풀리는 것 때문에 그를 호되게 질책해야 했다.
또한 1890년대에 존스는 20세기에 엘렌 화잇의 글들을 오용할 것에 대한 발판을 놓았다. 그가 그녀의 글을 성경에 대한 거룩하고 무오한 주석으로 만든 것, 그녀의 글들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어 무오하다는 믿음 그리고 엘렌 화잇의 말을 그것들의 역사적 배경 및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한 축자주의적 해석 등이 특히 심각한 것이었다. 뒷부분의 주장을 폄으로써 그는 엘렌 화잇뿐 아니라 다른 이들로 그것들이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말하게” 할 수 있었다. 엘렌 화잇은 이런 영역들 각각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 영역들 모두에서 존스는 결국 엘렌 화잇의 봉사를 거부하기 위해 자신을 추켜세웠다. 그는 또한 20세기에 그녀의 저술들을 오용하고 오해하는 데로 교단을 이끌었다.
1900년에 존스는 자신의 ‘거룩 교회론’(holiness ecclesiology)에 입각하여 교회 조직에 대한 극단적인 이해를 발전시켰다. 초기의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존스도 모든 교회 조직은 잘못이 있으며 성령만이 필요한 유일한 조직이라고 믿었다. 즉 누구든지 성령을 지니면 외적인 인간 조직이 없이도 모두가 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스와 왜거너는 1901년과 1903년의 대총회 회기에 그런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맹렬하게 투쟁했다. 또한 이들은 권력 투쟁에서 교단 역사상 최고의 자리를 잃게 되자 1904-1909년 교단을 떠나 J. H. 켈로그와 연합하였다. 그 후 존스는 엘렌 화잇과 교회 전체를 공격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면서, 이따금 재림교회에 불쑥 나타나곤 한 급진적인 회중주의를 신봉했다.
존스는 1923년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제칠일 안식일은 준수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안식일 준수 오순절주의 회중과 교분을 가졌는데, 그들이 조직을 발전시킴으로써 결정적인 악을 자행할 때까지였다. 존스는 재림교회 신앙, A. G. 대니얼스, 조직 전체와 심각한 투쟁을 벌였다. 존스에게는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종교 자유의 본질이 되었던 것이다.
-George R. Knight
<싸인즈> 사에서 일하는 몇 년 동안 그와 왜거너는 재림교회와 구원의 계획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진보적인 개념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존스는 종교 자유의 영역에서 교단의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종교 자유의 주제는 1880년대에 일요일 법안 논쟁이 가열되기 시작하면서 상원의원 H. W, 블레어가 국가적 일요일 법안을 미국 상원 앞에 제시한 1888년 5월에 정점에 이른 이래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예언 해석에 관한 존스의 관심은 결국 그를 당시 교단에서 그 분야의 인정받는 전문가였던 유라이어 스미쓰와 갈등 관계로 이끌어 갔다. 그들의 갈등의 발단은 다니엘 7장의 열 뿔의 정체에 관한 상이한 견해와 관련되었다. 그리하여 1888년 대총회 회기에 갈등이 불거졌다. 그 중대한 회기로 말미암아 존스는 대총회 지도부와의 힘이 부치는 투쟁에서 E. J. 왜거너와 연루된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는 그 회기에서 종교 자유문제에 기여했지만, 그와 왜거너의 주요 기여는 구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드높인 데 있었다.
엘렌 화잇은 서부 출신의 이 청년들에게 교단이 반드시 들어야 할 구원에 관한 기별이 있음을 인식하고 적어도 1887년부터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전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그녀는 1888년 회기 동안에 그들 편에 섰고, 그 후 1889년과 1890년대 초에 북미를 횡단하며 재림교회에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을 전할 때도 그들과 함께했다. 1888년 이후 몇 년 동안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반항을 보고 엘렌 화잇은 재림교인들에게 주께서 존스 형제에게 “매우 귀중한 기별”(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을 주셨다는 것을 거듭거듭 일깨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존스와 왜거너의 가르침이 “무오하다”든지 그녀 자신이 그들이 전하는 모든 것에 동의한다고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원치도 않았다(Ms 56, 1890; 참조 Ms 15, 1888).
1880년대 말과 1890년대 초에 존스가 미국 의회 앞에 제시된 국가적 일요일 법안의 연례 결산을 공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재림교인들의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의회의 다양한 위원회 앞에 교단을 대표하여 여러 번 등장했는데, 그 첫 번째는 1888년 12월 13일에 있었다.
존스와 왜거너는 대총회 회기들에 특별 강사로서 급부상하여, 1890년대 동안 그들의 우세를 유지했다. 예컨대, 존스는 1893년 회기에 24번, 1895년 회기에 26번 설교했다. 1894년 초에 엘렌 화잇은 많은 이들이 존스와 그의 사상을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었다고 거듭거듭 개탄했다(Lt 27, 1894; Lt 6a, 1894). 그의 지위가 얼마나 격상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상징은, 1894년 교단의 지도자들이 당시 교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 가운데 하나인 <리뷰 앤드 헤럴드> 편집장으로 존경받던 유라이어 스미쓰의 자리를 존스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존스는 애나 라이스(Anna Rice)의 거짓 예언적 주장들에 동조함으로써(심지어는 1893년 대총회 회기에 그녀의 글들을 통해서 늦은 비를 불러오려는 데까지 나아감) 자신에게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1897년에 그가 편집장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고 스미쓰는 부편집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더 나이든 사람에게 정말 굴욕적인 일이었다.
존스의 신학은 1890년대 초에 변질되었다. 1893년에는 어느 정도 그리고 1895년에는 훨씬 더 강하게, 존스와 왜거너는 구원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인간의 인성과 한 점도 다름없이 똑같다는 개념을 두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르침이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에도 없진 않았으나 두드러지진 않았다. 그러나 1895년에 이르러 그런 가르침은 존스의 신학에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해에 그는 그 주제와 관련하여 6개의 대총회 설교 대부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닌 것을 포함하여 모든 점에서 인류와 꼭 같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존스는 거기서, 청중 가운데서 제시한 엘렌 화잇의 인용문,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형제이지만 같은 성정을 지닌 것에서는 형제가 아니다.”라는 진술에 대답해야 했다. 존스는 그 도전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와 같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와 같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참조 1895 GCB 231, 233, 327). 그 대답으로 존스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던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입증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그와 왜거너는 마침내 1950년대에 범교단적인 논쟁을 야기할 가르침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1890년대에 존스는 종교 자유, 예언 해석, 교회 조직, 신유 등에 관하여 극단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그의 몇몇 해석은 엘렌 화잇으로부터 직접적인 질책과 좀 더 온건한 권면을 받았다.
18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엘렌 화잇은 호주에 있었다. 그 기간에 미국에서의 그녀의 주대변인은 존스였다. 거듭거듭 그녀는 담대한 존스에게 제멋대로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시할 증언을 보냈는데, 그가 가장 힘든 상황에도 맞설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불행이지만, 그녀는 동시에 그가 그녀의 말에다 자신의 말을 섞어 그녀의 의도를 부풀리는 것 때문에 그를 호되게 질책해야 했다.
또한 1890년대에 존스는 20세기에 엘렌 화잇의 글들을 오용할 것에 대한 발판을 놓았다. 그가 그녀의 글을 성경에 대한 거룩하고 무오한 주석으로 만든 것, 그녀의 글들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어 무오하다는 믿음 그리고 엘렌 화잇의 말을 그것들의 역사적 배경 및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한 축자주의적 해석 등이 특히 심각한 것이었다. 뒷부분의 주장을 폄으로써 그는 엘렌 화잇뿐 아니라 다른 이들로 그것들이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말하게” 할 수 있었다. 엘렌 화잇은 이런 영역들 각각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 영역들 모두에서 존스는 결국 엘렌 화잇의 봉사를 거부하기 위해 자신을 추켜세웠다. 그는 또한 20세기에 그녀의 저술들을 오용하고 오해하는 데로 교단을 이끌었다.
1900년에 존스는 자신의 ‘거룩 교회론’(holiness ecclesiology)에 입각하여 교회 조직에 대한 극단적인 이해를 발전시켰다. 초기의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존스도 모든 교회 조직은 잘못이 있으며 성령만이 필요한 유일한 조직이라고 믿었다. 즉 누구든지 성령을 지니면 외적인 인간 조직이 없이도 모두가 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스와 왜거너는 1901년과 1903년의 대총회 회기에 그런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맹렬하게 투쟁했다. 또한 이들은 권력 투쟁에서 교단 역사상 최고의 자리를 잃게 되자 1904-1909년 교단을 떠나 J. H. 켈로그와 연합하였다. 그 후 존스는 엘렌 화잇과 교회 전체를 공격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면서, 이따금 재림교회에 불쑥 나타나곤 한 급진적인 회중주의를 신봉했다.
존스는 1923년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제칠일 안식일은 준수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안식일 준수 오순절주의 회중과 교분을 가졌는데, 그들이 조직을 발전시킴으로써 결정적인 악을 자행할 때까지였다. 존스는 재림교회 신앙, A. G. 대니얼스, 조직 전체와 심각한 투쟁을 벌였다. 존스에게는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종교 자유의 본질이 되었던 것이다.
-George R. K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