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3·1운동 1주년기념 축하경고문’ 사건과 시조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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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3.0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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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명령서를 받아든 재림교인 최덕성은...
이 사건에 재림교회 출판기관인 시조사가 관여되어 있고, 시조사에 근무하던 재림교인들이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함으로써 3·1운동에서의 재림교회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사건의 판결문은 감리교인이던 이동욱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에서는 피고 김동욱을 다루면서, 그가 1920년(大正 9년) 2월 24일에 경성부 원동 자책에서 장병준, 박기영 등과 공모하여 “대한독립 1주년기념 축하경고문”을 만들어 대전, 대구, 마산 등으로 보급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되어 이동욱, 권학규, 유진상 등이 실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 목사였던 유영순에 따르면 사건의 중심이 재림교회로 옮겨 온다. 사건의 발단은 재림교인이었던 최덕성이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로부터 기미년 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가지라는 명령서를 받아 친구이자 당시 시조사의 출판을 담당하고 있던 유영순 목사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로써 재림교회 출판소인 시조사는 3·1운동 1주년 기념사건과 관련된 중심이 된다. 유영순은 유진상, 김원제 등과 논의한 후 평소 친분이 있던 감리교인 이동욱 및 천도교와 공조하여 자금을 확보한 후 경고문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시조사에서 유흥순이 비밀리에 채자(埰字)를 한 후 유진상이 식자와 조판을 한 후 자기 집으로 가져가 미리 설채해놓은 인쇄기로 2000장의 경고문을 만들었다.
경고문의 내용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대한독립 1주년 기념일에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하고, 상점들은 동맹휴업을 하여 자유독립만세 정신을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이 경고문을 전국으로 배포하기 위해 매일 밤마다 인쇄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인쇄 업무에는 김원제와 권학규가 함께 하였다. 이 과정 중에서 유진상의 동생 유진익이 인쇄물 3000장을 이동욱에게 전하던 중에 일경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인쇄를 담당했던 유진상이 추가로 체포되었고, 고문 끝에 권학규 한 사람만을 공모자로 시인하여 이동욱과 유진익 외에 유진상과 권학규 등이 투옥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유진상과 권학규는 시조사에 근무하던 인쇄 기술자들이었고, 유진익은 유진상의 동생으로 모두 다 재림교인이었다. 아울러 시조사 직원이었던 김원제는 이 사건 이후 조선독립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중에 체포되는 등 재림교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 권학규는 감옥에서 고초를 겪다가 1921년 2월 8일에 병보석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그 다음날인 2월 9일에 병서(病逝)하였다. 그는 재림교인으로서 3·1운동과 연관된 첫 번째 희생자였으며, 이 업적으로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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