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유일의 집단 항일 신앙공동체 유적지 ‘적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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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3.0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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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부터 해방 때까지 집단생활 “한국의 카타콤”
한반도 유일의 집단 항일 신앙공동체 유적지인 이곳은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애국애족의 사적지이자 소중한 배움의 터로 자리하고 있다.
민초들이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피신해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민족혼을 지킨 이곳은 해방된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제의 수탈로 밟히고 찢긴 우리 민족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여전히 곳곳에 깊게 패어있다.
젊은이들이 전쟁터와 징용으로 잡혀가고, 꽃다운 처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던 민족수난의 시기, 70여명의 재림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이 깊은 산중까지 찾아들었다. 선구자들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믿고 삶을 바쳐 헌신하며 재림기별을 수호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1943년 9월 15일부터 해방 뒤인 1945년 8월 22일까지 가평역에서 걸어서 꼬박 하룻길인 이곳에 칩거하며 재림신앙을 지켰다. 당시 평신도지도자였던 신태식, 반내현 선생 등 여러 명의 선발대가 먼저 도착한 후 교회와 움막을 짓고 터전을 마련했다.
1943년 12월초에는 김명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연말기도주일 및 사경회를 열고, 나라의 독립과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그해 12월 27일, 일제에 의해 한국 재림교회는 해산됐다.
일경의 눈을 피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이들은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생계는 인근의 경춘철도임업회사에서 침목 만드는 작업을 하청 받아 벌목함으로써 양식의 일부를 조달했다. 작업명단에 올라간 14명은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침목을 깎는 일을 하고, 일당으로 현미쌀(일당 어른은 700g, 어린이는 300g)과 소금 약간을 배급받았다. 하지만 이를 갖고는 70여명의 대식구가 식생활을 하기엔 항상 태부족이었다.
생활은 초대 교회처럼 유무상통이었다. 신앙공동체 생활을 했던 이들은 식량을 항상 같이 나눠 먹고 살았다. 그러나 숫자가 늘면서 모두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래서 독이 없는 모든 풀을 뜯어먹었다. 음식을 구할 수 없는 겨울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했다. 소나무껍질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송기떡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식수는 개울물을 사용했고, 교회 주변의 작은 공간들을 텃밭으로 개간해 배추, 무 등을 심어 재배했다.
그러면서도 신앙의지는 약해지지 않았다. 매일 오전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멀찍이 떨어진 산과 바위로 흩어져 새벽기도를 드리고, 6시에 하산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아침식사는 주로 배급으로 받은 현미쌀과 시래기국으로 때웠고, 점심은 주먹밥으로 간신히 요기하는 수준이었다. 저녁은 벌목작업 후 6시경에 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2시간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했다. 1944년 6월 17일에는 노사라, 오명숙, 지현각 씨의 어머니 등 3명이 이곳에서 김명길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기도 했다.
매주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1944년 겨울, 일본 헌병대가 급습한 후에는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예배만 드렸다. 안식일 오후에는 나무하러 가는 복장으로 교회에서 2~4Km 떨어진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도 공부하고, 찬송도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내려오곤 했다.
일경의 수사가 있은 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신태식 씨와 노사라 씨 가족을 비롯한 20여명을 설악산과 금강산으로 피신시켰다. 헌병대가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어서 강제 징집될만한 청년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피해야 했다. 일부 노인과 어린이들은 이곳에서 가평 방향으로 1.2Km 떨어진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 와중에도 그해 12월에는 조경철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연말기도주일 및 사경회를 열고, 일제의 모진 핍박에 고난 받는 백성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반내현 목사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때에도, 순교를 무릅쓰고 사선을 넘어 복음전도 활동을 다녔다. 성경예언의 따라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던 성도들의 신앙심을 일깨우고, 지도자를 양성했다. 또한 날마다 조국 광복을 기원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7일, 경춘철도 직원에게 해방 소식을 들었다. 역사는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월 17일 금요일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해방! 꿈이 아닐까. 죽은 듯 고요하던 산 속에서 갑자기 새들이 노래하고, 풀벌레들이 뛰었다. 꽃들이 향기를 발하고, 나무들이 손짓했다. 물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억압에 막혔던 눈과 귀가 갑자기 뻥 뚫린 것일까. 천지만물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해방의 소식을 들은 그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다. 움막 속에 숨어서 목소리를 죽여 가며 예배하던 속박의 세월이 지나가고 넓은 풀밭에 둘러앉아 산이 떠나가도록 찬미를 부르며 감격적인 안식일 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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