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봉원영 교수 “문제해결을 위한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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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5.27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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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관점에서 본 선교적 - 성육신적 교회 개척
2015년 1월,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은 유럽의 수백 개 교회가 이미 문을 닫았거나 교인수의 감소로 인해 앞으로 문을 닫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사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전체 가톨릭교회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000곳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았음을 밝혔다. 네덜란드의 개신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4년 이내에 700곳 이상의 교회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덴마크에서는 이미 200여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독일의 가톨릭교회는 지난 10년간 공식적으로 515개가 사라졌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도 더 이상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6,000에서 10,000개의 교회들이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으며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 국민들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스스로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예전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헌금은 수십 년째 감소하고 있으며 무종교인들이 미국의 인구증가와 비례하여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충격 앞에서 세계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출발을 시작할 수 있을까?
1990년대 말에 등장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교회로 하여금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어떠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교회를 부르셨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본래 교회는 주변 문화의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화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와 의미 있는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선교적 교회는 보다 성육신적이고 메시아적이며 사도적인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선교적 교회의 입장에서 전도란 전적인 성육신적 접근(Holistic Incarnational Approach)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일상의 삶에서 거룩함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비그리스도인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의 정기적인 교제를 통해 깊이 있는 친분을 쌓아 그들을 복음 전도자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최근 선교적 교회의 실천과 더불어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교회개척이다. 그런데 선교적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임을 기억할 때 교회개척은 선교적 교회론의 주장이 아니라 교회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에서의 교회개척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결과일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사회적 영성을 회복하고 사회와 역사 속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통합적 영성14)을 확대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생적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로 지난 8년 동안 한국연합회 차원에서의 교회 현황을 살펴보면 교회가 690곳, 예배소가 198곳이었던 2010년에 비해 2018년도는 각각 677곳, 136곳으로, 모두 75개의 교회 혹은 예배소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교회의 경우 98.12%, 예배소는 68.69% 감소한 것이다. 이 중에서 같은 기간 동안 합병, 해산 그리고 개척된 교회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표2. 한국연합회 교회합병, 해산, 개척수(2010-2018)]
교회가 합병되거나 해산하는 경우가 개척되는 수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교회합병의 경우, 그것이 선교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합병과 개척 중에서 어느 것이 더욱 효율적인지, 혹은 어느 것이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까운 지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일이다.
오늘날에도 여러 지역들에서는 “와보라”는 방식의 끌어들이는(attractional) 전도전략이 여전히 효율성을 나타내는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육신적(incarnational) 사역이 함께 결합될 때 더 많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성육신적 교회는 곳간에 저장하는 것보다, 추수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제 끌어들이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교회들을 선교적인 교회로 전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새로운 대안인가? 정체성의 회복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과연 교회개척은 죽어가는 교회들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교회의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가, 아니면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전도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결과의 측면이나 방법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도는 오로지 메시지의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며 성경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성경적인 복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바른 신학에서 바른 실천과 사역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업이 아니다(the church is not a business). 사업(business)은 궁극적으로 돈을 벌고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사업이 어떤 목표(goal)나 임무(mission)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목표나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회가 기본적으로 사업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을 늘리고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이상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그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교회개척은 다음의 이유들로 인해서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선교의 통전적(holistic or wholistic) 개념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선교적(missional)이신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교적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여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참여하는 선교가 반드시 통전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선교의 영역은 복음의 범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데 복음이 단순히 개인적인 것에만 국한된다면 그 복음의 능력은 그저 개인적인 신앙을 이끄는 정도밖에 역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복음의 능력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온 인류와 사회, 공동체에까지 이르는 전 우주적인 영역의 통전적 선교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 때문이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선교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에 반응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연스럽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분이 전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셋째는 교회의 사도성 때문이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래서 교회는 건물의 개념을 넘어선다. 또한 교회는 여러 가지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단순히 그런 것들의 총합(總合)에 그치지 않는다. 교회는 거룩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이며, 영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다.113)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에 전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성령에 의해 창조된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교회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일정한 선교적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사도적이라는 말은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청지기직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권위는 교회가 세상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가시화된다. 사도의 기본적 정의는 ‘보냄을 받은 자’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의 메시지를 땅 끝까지 전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 파송되었다. 교회의 파송됨은 처음 열두 명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적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모든 신앙공동체는 이 파송됨을 계승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개척은 더욱 이러한 본질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교회성장의 관점에서 교회의 자연적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단순함이기 때문이다. 로렌드 알렌(Roland Allen)은 신약시대의 초기교회가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단순한 원리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당시 초기교회가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을 가진 매우 작은 교회 조직을 이루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모든 회심자들이 공유할 수 있었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교회였음을 강조한다. 커지는 것보다는 적어지는 것이 더욱 초기교회적이었다.
다섯째로 엘렌 화잇이 교회개척을 강조했던 이유에는 교회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도 관련이 깊다. 새로운 교회들은 교회의 다양한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참여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것은 곧 더 많은 사람들이 활발한 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더 많은 신자들의 교회 사역과 선교로의 참여는 곧 건강한 교회로 이어진다. 이는 통합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영적만족도 조사에서, 이전 교회에 비해 교회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는 증가했으나 자신의 영적성숙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한 것과 비교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체계화된 프로그램이나 어떤 활동도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체도 아니다. 교회는 제도에 묶여 있는 어떤 합법적인 권위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의 사회적 공동체, 곧 하나님과 화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서로 화해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화해된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친교 안에 있는 것이다.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상호의존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건물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예배당 건축을 성전건축이라고 오도하기 보다는,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성전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삶을 살아서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일깨워야 한다.
교회개척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항상 밖으로 손을 뻗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때까지,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적 열정과 정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오늘날 우리 재림교회에 필요한 정신이고 회복해야 할 사명이며 정체성이다. 그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이 말씀이 우리 삶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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