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청년, 길을 묻다 - 조문양 교수 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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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7.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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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찬미와 현대의 복음성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 먼저, ‘전통적 찬미가’와 ‘현대 복음성가’라는 용어를 정리하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전통적 찬미가’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를 뜻하는 것이고, ‘현대 복음성가’는 CCM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CCM 찬양문화를 단순한 문화현상으로 설명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재림신자들은 세상역사를 「선악 간의 대쟁투 역사관」으로 이해합니다. 즉, 하나님의 문화와 사탄의 문화 간에 일어나는 충돌 현장이 세상역사라는 것이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자면, 찬미가와 CCM은 조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충돌관계에 있습니다. 그 충돌현장이 개인의 마음속이거나 아니면 집단 간일 수도 있죠. 찬미가와 CCM간의 충돌 요인은 “예배음악으로서 어느 음악이 적합한가?”하는 것입니다. 찬미가가 적합하면 CCM이 부적합하고, CCM이 적합하면 찬미가가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문제는 몇 마디의 설명으로 대답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교회음악 전문 학자나 신학자들, 목회현장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세대, 이념 간의 일어나는 문화충돌도 만만치 않지만, 이들은 서로 양보하여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할 수도 있죠.
그러나 찬미가와 CCM의 충돌은 단순한 문화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충돌입니다. 「예배 음악으로서 CCM은 부적합한 음악이다」라는 가설 아래 CCM이 가지고 있는 ①과도한 오락성 ②세속적인 연주법 ③샤머니즘의 주술(呪術)성 ④선정(煽情)성 ⑤팝 연주장 분위기의 연주환경 ⑥상업성 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CCM의 문제는 ‘과도한 오락성’입니다. 찬미가를 대중가요처럼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게 CCM입니다. 즉 20세기 중반 온 세상을 휩쓸었던 록음악에 찬미 가사를 대입해 만든 음악이 CCM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록음악(Rock ‘n’ roll)은 과도한 오락성과 선정성을 가진 히피들이 즐겨 부르던 대중음악이었습니다.
히피들은 사랑과 자유와 평화를 외치며 기성문화에 대항했지만, 자유분방한 저들의 생활은 오히려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며, 지각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죠. 저들이 외치던 사랑은 성적 방종을 초래했고, 이는 곧 성도덕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는 에이즈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죠. 저들이 외치던 자유는 마약남용으로, 저들이 외치던 평화는 병역 기피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즈음, 이들 히피족의 음악이었던 록음악은 <찬미가 옷>을 입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CCM의 원조인 록음악은 그 과도한 오락성으로 전 세계를 장악했고 그 록음악에 편승하여 태어난 CCM은 그 오락성을 이용하여 온 세계 교회를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찬미가는 가사와 음악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죠. 이들 두 요소 중 가사는 그 주체이고 음악은 매체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상호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 하나는 거룩한 가사로 인해 음악이 거룩한 음악으로 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속된 음악으로 인해 거룩한 가사가 세속화 되는 일입니다. 말 할 것도 없이 전자는 찬미가이고, 후자는 CCM입니다.
오락이 언제나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적당한 휴식이 필요하죠. 그 여가에 오락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풍요로운 현대인의 삶에서 휴양은 오락으로, 오락은 환락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환락은 전 인류를 노예화했죠.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주말휴일이나 여름휴가를 보람 있게 보내려는 수단으로 변해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유흥비를 벌기 위해 강도짓이나 살인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있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예언의 신은 오락의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오락이란 환락을 구하는 것이요. 흔히 그 도를 넘기 쉬우며 유용한 활동을 위하여 요구되는 정력을 빼앗아가므로 인생의 참된 성공의 방해가 된”<교육 190p>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이나 모든 음악은 예술성과 오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성이 오락성보다 많은 음악을 ‘고전음악’이라고 하고 예술성이 오락성보다 적은 음악을 ‘대중음악’이라고 합니다. 전자가 찬미가의 경우라면 후자가 CCM의 경우입니다. 전 세계를 정복한 록음악의 파워는 ‘과도한 오락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 교회를 장악한 CCM의 파워도 ‘과도한 오락성’입니다. 과도한 오락성을 가진 CCM은 경건한 예배를 유흥장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예배음악으로서는 부적합하지요.
음악요소들 중 그 어느 요소보다 오락성이 강한 게 바로 리듬입니다. 타악기로 연주되는 두드림은 지성이나 감성보다는 생체에 직접 호소합니다. 흥미로운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작은 북 소리를 들려주고 반응을 관찰했죠. 거의 모든 사람의 발이나 손으로, 혹은 표정으로 들려 준 북소리에 맞추어 동작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경건한 모습을 파괴하는데 효과적인 요소는 타악기의 두드림입니다. 성경 곳곳에 기록된 하나님을 만났던 믿음의 조상들의 몸가짐에서 손이나 발장단을 찾을 수 없죠. 저들은 하나 같이 이마를 땅에 대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기도하는 모습은 본 받아야 할 경건의 자세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절정의 고통 중에 CCM 찬양자들처럼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기도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모습은 이마를 땅에 댄 자세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CCM에 내재되어 있는 오락성은 CCM이 연주되는 즉시 거룩한 예배를 오락현장으로 변화시킵니다. CCM은 예배음악이 될 수 없습니다. CCM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다 보니 오해를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마디 말씀 드립니다. CCM 중에도 찬미가로 사용할 수 있는 노래들이 섞여 있는데 이에 대한 것은 <연주법>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CCM의 문제는 ‘세속적인 연주법’입니다. 음악은 연주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연주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작곡자에 의해 종이에 그려진 악보는 소리법칙을 적어 놓은 기호에 불과합니다. 작곡이 음악의 1차적인 창작이라면, 연주는 2차적인 창작입니다. 작곡자는 음악 감동의 기본 요인을 제공하고, 연주자는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음악의 감동은 연주자에 의해 그 양상이 달라집니다.
‘찬미가’를 대중가요 창법(연주법)으로 노래하면 <대중가요>가 되고 ‘대중가요’를 고전음악 연주법으로 연주하면 <예술가곡>이 됩니다. 때문에 성경적인 가사의 CCM을 전통적인 교회음악 연주법으로 연주하면 찬미가로 사용할 수 있는 곡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CCM은 세속적인 연주, 즉 팝음악의 연주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연주되는 장소가 오락장화 됩니다. 따라서 예배음악으로 부적절합니다.
▲ 그렇다면, ‘세속적인 연주법’은 어떤 것인가요?
-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목청이 찢어질 듯 질러내는 창법이고, 또 하나는 감미롭고 미세한 소리로 흐느끼듯 호소하는 창법입니다.
우선 질러대는 창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질러 대는 창법이 예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들 동의하실 줄 믿습니다. 창법 자체도 교회문화에 맞지 않지만, 이 창법에 수반되는 신체표현도 문제가 됩니다. 신체표현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격렬한 춤사위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떤 특정한 신체표현이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행가 가수를 무색하게 할 얼굴표정과 몸놀림은 교회문화와 맞지 않죠.
교회문화를 해치는 또 하나는 이 창법의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 사용되는 쉬지 않고 두드리는 타악기, 지축을 울리는 베이스기타, 흐느끼는 색소폰 등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카바레 분위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가보지 않아도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또 한 가지 문제는 감미롭고 미세한 소리로 흐느끼듯 호소하는 창법입니다. 이때에 속삭이는 감미로운 그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마이크를 입술에 대고 노래합니다. 지나치게 마이크를 입술에 밀착하고 노래하면 청중들의 귀에는 가수의 내면의 숨결까지 전달됩니다. 아시는 대로 이 같은 내면의 숨소리는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는 소리죠.
동성 간에는 물론이고, 부부간이나 결혼을 앞둔 연인 사이의 사랑의 대화 이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은밀한 소리는 청중들에게 성적자극을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예배음악으로서는 부적절합니다.
연주법과 연관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전자 음향기기에 의해 과도하게 증폭된 음향입니다. 그 크기가 100데시벨을 초과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민간 항공기 이륙할 때의 소음이 100데시벨이고, 전투기는 110데시벨이라고 합니다. 조용한 사무실이 50데시벨인데 비하면 그 음량의 크기를 알 수 있죠. 만일 안식일예배 때, 이런 음악을 사용하면 회중들은 천둥 치는 소리를 밀폐된 교회당 안에서 듣게 되는 겁니다.
증폭된 굉음은 경건한 예배분위기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청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수의 대중음악 연주자들이 청각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CCM의 세속적인 연주법은 예배음악으로 매우 부적절합니다.
세 번째, CCM의 문제는 ‘오락장 분위기의 연주환경’입니다. CCM찬양이 있는 교회의 강단이 번쩍이는 현란한 조명이 있는 무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거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현장은 유행가 가수를 능가하는 몸동작과 목청이 찢어져라 질러대는 창법과 전자기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악기와 전자장비에 의한 지나치게 확대된 음향으로 가득한 장소로 변했고, 변해 가고 있습니다.
찬양가수들의 옷차림도 문제가 있습니다. CCM은 하늘과 세상의 즐거움을 단번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무대에서 껑충껑충 뛰며 열창하는 CCM 가수들에 의해 정점에 이르는데, 온 교회가 마치 환락의 도가니로 변하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언젠가 한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에서 CCM 콘서트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아멘!” 대신 “헤이!”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CCM은 거룩한 예배음악으로서는 부적합한 음악입니다. 한국 재림교회는 아직 그 영향권에 있지 아니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성령께서는 결코 잡음의 광태과 같은 그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가려 뽑은 기별 2권 36p>.
네 번째 CCM의 문제는 ‘샤머니즘의 주술(呪術)성’입니다. 무당이 굿판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중얼거림처럼, 어떤 한 개의 단어나 어구를 수 없이 반복하여 노래함으로써 주술적인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집단적으로 “할렐루야”를 200회 반복했다는 어느 개신교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개신교회의 어느 기도원에서 “주여~”를 밤새워 외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것은 샤머니즘적인 방법입니다. 단언컨대, 성령감동은 주술효과에 의한 게 아닙니다. 음악에서의 가사 반복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곡에서 원래의 시에는 한 번 나오는 가사나 낱말을 반복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주술효과를 얻기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한 번은 청년들이 주축이 되는 ‘찬양과 경배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전에 약 30분가량의 찬양시간 있었는데 여러 가지 복음성가와 함께 찬미가 171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4절에서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가 수도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주먹 쥔 인도자의 팔과 열정이 담긴 얼굴 표정에 압도된 회중들의 찬양은 횟수가 쌓일수록 그 열기는 더해 갔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를 열 번도 더 반복하여 부르면서 이제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찬미는 계속되었습니다. 찬미를 따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지만. 더 이상 부를 수 없어서 노래를 그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끝은 허전함뿐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갈멜산상에서 바알의 사제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자 온종일 “바알이여! 바알이여!”를 외쳤죠. 그러나 제단과 제물을 불사르게 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는 단순하며 진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CCM의 주술성은 회중에게 은혜감동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중들은 ‘강요당하는 은혜 감동’에 젖어 있기도 합니다. 감동의 눈물을 외적인 요소로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섯 번째, CCM의 문제는 ‘선정성’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CCM이 갖고 있는 ‘과도한 오락성’과 ‘유행가식의 연주법’ 그리고 ‘유흥장 분위기의 연주환경’과 ‘샤머니즘의 주술성’ 등은 모두 선정성을 유발합니다. 선정성의 사전적 의미는 ‘정욕을 북돋우어 일으키는 것’인데, 그 정욕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를 말합니다.
CCM에 의해 일어난 욕구는 CCM처럼 생각하고, CCM처럼 행동하며, CCM을 닮고 싶은 마음 상태입니다. 록음악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록음악 가수처럼 노래하며, 그들처럼 옷을 입으며, 심지어 그들처럼 마약을 사용하고, 그들처럼 살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CCM의 선정성이 록음악의 그것에 비해 더 강력하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CCM이 ‘값싼 복음’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쾌락과 천국복락을 단 번에 누리고 있다는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겁니다. CCM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강요당한 성령감동>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 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가짜 천국기쁨에 빠져 있으면서 자신은 구원 받았다는 확신 속에 살고 있지나 아니한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긴급한 기별을 깡그리 잊은 상태에서 마음은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이 바로 CCM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진리와 오류를 혼합해 그것이 오염된 진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때를 위한 순결하고 성실하고 고상하고 고결하며 성화시키는 진리를 무력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은폐시키려는 사탄의 발명품이다”<가려 뽑은 기별 2권 36p>.
종교암흑 시대가 그러했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음악을 통해 예배를 세속화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속화하는 도구 중에 음악만큼 유효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CCM의 문제는 ‘상업성’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CCM의 특성인 ‘과도한 오락성’ ‘세속적인 연주법’ ‘오락장 분위기의 연주환경’ ‘샤머니즘의 주술성’ ‘선정성’ 등은 CCM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팝음악의 소비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 짐작합니다. 그런데 CCM 또한 팝음악과 거의 비등한 거대 소비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 종교, 예술 등, 무엇이든지 상업화되면 부패하게 됩니다. 돈 맛을 알게 된 교회가 어처구니없이 저지른 일이 천주교의 면죄부 판매입니다. 뉴스에 회자되는 유력한 복음방송 목사들이나 교회를 매매물로 거래하는 일이 모두 돈과 연관되어 벌어집니다. 그 배후에는 늘 사탄이 있습니다. CCM의 상업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탄이 CCM을 그냥 놔 둘 리가 없죠.
복음을 상업수단으로 이용한 일은 사도 시대에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17절에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한글 개역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을 혼잡하게 했다는 기록에 사용된 혼잡은 복음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었다는 뜻인데, <쉬운성경>에는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 <가스펠 이야기 #7 CCM의 명암>, 등을 검색하시면 관련 자료들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수익성이 있는 상품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기업인입니다. 이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돈벌이 수단으로 CCM을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CCM은 더 신나고 재미나는 음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CCM 찬양이 예배의 중심이 된다면 예배가 오락화도 신속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CCM은 오락성으로 상품이 됐지만, 그 상품성은 예배를 세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CCM의 문제점은 ‘이방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감’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CCM이 지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이고도 합니다. 지금까지 CCM이 예배음악으로서 부적절한 이유로 언급한 ‘과도한 오락성’ ‘세속적인 연주법’ ‘오락장 분위기의 연주환경’ ‘샤머니즘의 주술성’ ‘선정성’ ‘상업성’ 등은 교회문화와 상관없는 세속문화라는데 모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문화와 세상문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로 금하고 계십니다. 죄의 언저리에 서성되는 것 자체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조상 하와가 선악과 곁에서 서성거리는 순간에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3장에 범죄이야기가 나온 후 창세기 6장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간의 교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문화와 세상 사람의 자녀들의 문화가 혼합되는 순간부터 죄가 관용하게 되었는데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는 기록이 창세기 6장2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 즉 교회문화와 사탄의 자녀들 사이에 세속문화는 단절되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3절에는 그로 인해 일어난 슬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결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내린 심판이 처참한 노아의 홍수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이 끝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방문화를 따르지 말라며 아래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며”(레 21:5).
이 말씀은 제사장들에게 주신 명령인데, 이 말씀에 앞서 레위기 19장27절과 28절에는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는 동일한 명령을 일반백성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머리털을 밀어 대머리를 만드는 일, 수염 양편을 깎는 일, 살을 베는 일, 문신 새기는 일 등은 율법과 율례에 금하지 않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문화현상입니다. 그저 가나안인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머리 자르는 방법 수염 다듬는 방법 등은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두발문제나 문신문제는 개인취향 문제일 뿐이죠.
만일 오늘날 찢어진 청바지나 지나치게 짧은 치마 혹은 반바지 착용을 종교적인 이유로 금지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에게 주신 두발문제, 문신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고 엄했습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속문화를 차단하려는 조치였습니다.
가나안인들의 문화는 잡신의 문화였습니다. 바알을 섬기지 말라 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알숭배 문화가 들어 있는 세속문화를 차단하심으로 바알숭배를 원천 봉쇄하셨던 겁니다.
기억하시겠지만, 1970년대 중고등학생들의 두발검사가 있었죠. 머리를 기르려는 학생과 기어이 깎으려는 학교당국간의 싸움은 처절했습니다. 긴 머리가 죄는 아니었지만 장발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학생들의 일탈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CCM을 단죄하기에 앞서 CCM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예배의 세속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이는 CCM 찬양예배가 성경적 예배문화를 파괴하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이방문화를 차단할 것을 엄하게 지시하셨지만,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과 대치했을 때에 일어난 범죄(민 25장)로 인하여 2만4000명이 염병으로 죽었죠. 당시 상황을 민수기 25장1~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모압의 주신은 바알인데, 다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었던 모압인들은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의 제사였죠. 제사의 절정은 바알 사제들과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이었습니다. 축제 끝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애당초 이러한 축제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죄의 먼지가 덮인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죄의 본성은 그만큼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속문화와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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