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펜버그 누나’ 사엄태 선교사 기념비 건립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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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10.1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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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림교회 최초 여성선교사이자 여성교육 창시자
사엄태 선교사는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여성선교사이자, 여성교육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기념비는 교내 오얏봉 기슭에 자리 잡았다. 제막식은 지난 11일 ‘Prospect 21C: 미래 삼육교육을 전망한다’는 주제로 개최한 특별 학술세미나 직후 열렸다.
사엄태(Mimi Scharffenberg, 1883-1919) 선교사는 1883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8남매 중 맏이로 출생했다. 1901년 미시간 주 배틀크릭대학에 입학한 후 위스콘신 주에서 여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1월 10일 한국 재림교회 첫 여선교사로 내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사엄태 선교사는 스미스 목사(초대 교장)와 함께 평안남도 순안에서 사역자 양성학교(삼육대 전신)를 설립하고, 여학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초대 시조사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과 출판 사업에 헌신하던 그는 1918년 6월, 병을 얻어 미국으로 귀국한 후 1919년 12월 19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조선 땅에 온 지 만 13년째 되는 해였다. 올해는 그가 잠든 지 꼭 10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의 부음을 접한 조선합회 평의원회는 1920년 1월호 <교회지남>에 “사랑하는 우리의 누나 ... 조선을 위하여 ... 그렇듯 사랑하여 막대한 근면과 고심으로 행하던 일, 심한 병을 얻은 후에도 힘쓰던 일 ... 지금 잠든 누나의 훌륭한 모본을 힘써 따르기를 포고하노라”라는 추모사를 게재하며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이런 행적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많은 선교사와 여성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삼육대는 올해 개교 113주년과 사엄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특별위원회(TFT)를 구성하고, 선교사의 한국선교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위원회는 초대 여선교사로서 대학의 전신인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를 공동 설립하고, 여성 교육사업 등에 헌신한 선교사의 아름다운 사역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게 됐다. 기념비 건립비용은 간호대학 고명숙 학장과 대외협력처 신성례 처장을 비롯한 여교수들이 기부해 마련했다.
김성익 총장은 “이 기념비는 삼육대의 뿌리가 헌신과 희생에 기초한 것임을 밝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봉사하는 인재로 교육받은 우리 학생들이 자신의 봉사로 변화를 입은 사람들을 명예로 여기게 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는 기념비 건립 취지 전문.
■ 사엄태(Mimi Scharffenberg) 선교사 기념비 건립 취지는?
사엄태 선교사는 1907년 1월 10일 23세의 나이로 한국에 도착한 여성 선교사입니다. 사엄태 선교사가 우리 재림교단은 물론이고, 삼육대학교에 중요한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W. R. 스미스 목사는 당시 진남포에서 순안으로 이주해 와서 사역자양성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실행으로 옮기게 된 것은 1907년 1월 10일에 사엄태 선교사가 합류하면서부터입니다. 평안남도 관찰사로부터 학교부지 5만5000평을 무상으로 제공받은 후에 조선교회의 힘으로는 건축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건축경비 조달을 위해 미국에 친지들과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전체 모금한 액수가 일본돈 693엔이었습니다. 그 중 대총회가 200엔의 보조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스미스 목사의 장모가 170엔을 모아주었고, 사엄태 여사의 여동생이 200엔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여동생은 이후 1909년에 남편 왕아시 목사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온 왕대아 여사입니다. 또한 사엄태 선교사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123엔을 보내주었습니다. 스미스 목사가 170엔을 모금했고, 사엄태 선교사는 323엔을 모금했습니다.
둘째로 사엄태 여사는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07년 순안 양성학교가 남학교로 건물을 관찰사로부터 기증받고 설립신청을 하여 9월 12일 관찰사의 설립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엄태 선교사는 여학생에 대한 교육의 필요를 느끼고 같은 해 12월 9일에 그녀의 지도하에 여학생들도 모집하였습니다.
이후 진남포로 이전했다가 다시 1910년 11월 1일 다시 순안으로 이전하여 1913년 남녀기숙사가 신축되어 남녀학교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다가 1921년 6월 13일 공식적으로 남녀공학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여학생들에게 근대교육을 허용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기임에도 선구적인 사엄태 선교사와 교회지도자들의 의지로 교육사업 초기부터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 20대 젊은 여성선교사가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은 여전히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제약이 존재하는 현실에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도록 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후 시조사 편집국장, 안식일학교 주임, 월간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고 1918년 6월 병에 걸려 미국으로 귀국한 후 1919년 12월 19일 36세의 일기로 주안에 잠들었습니다.
이 기념비가 삼육대학교의 뿌리가 헌신과 희생에 기초한 것임을 밝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봉사하는 인재로 교육받는 우리의 귀한 학생들이 세상에 나가 헌신하는 봉사로 변화를 입은 사람들을 자신의 삶의 명예로 여기게 만드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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