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공동체 內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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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영 교수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20.05.13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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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책임을 위탁받은 사람은 끝까지 이를 고수해야”
봉원영 교수(삼육대 신학과)
■ “수년 내에 주님의 일을 부흥시”키는 또 다른 사회적 확산의 시발점
케네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은 기독교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통계와 지리적 확장, 기독교 운동의 양과 질적인 활성화, 그리고 개인과 시민사회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 등 이 세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는 앞선 두 가지 국면에 더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후기 기독교왕국(Post-Christendom) 시대로 들어선 지금은 교회가 공공권에서의 공헌을 통한 공적인 참여와 책임의 실천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면서 개인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서, 세상은 먼저 보이는 교회를 경험함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고 갈망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종래에 하나님 나라에서 맛보게 될 정의와 사랑, 평화와 행복을 이 땅의 교회가 이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그것들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는 온전한 교회다움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양극화인데 경제적 양극화, 세대간 양극화, 지역간 양극화와 더불어, 세속 사회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종교적 양극화, 특별히 무종교적인 세속주의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기독교와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현대 사회에서의 기술의 진보가 결과적으로 급격한 고용의 하락을 유도하여 노동자 계급의 몰락을 촉진할 것으로 예견했으며,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는 더욱 노동 분야의 변화와 일자리 감소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칼 프레이(Carl B. Frey)와 마이클 오보른(Michael Osborne)이 700개 이상의 직업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공동 연구에서 앞으로 20년 내에 현재의 직업들 가운데 47%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2016년의 세계경제포럼에서는 향후 5년 안에 약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중의 3분 2는 단순 노동직이 아닌 소위 화이트 컬러의 직종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일자리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기회를 잃은 사람들의 증가를 가져와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의 심화현상이 가속화 될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을 특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양극화도 더 심화되어 나타날 것인데 이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환경이 그것에 이미 익숙한 디지털 원주민으로서의 Z세대와 상대적으로 그것과 친숙하지 않은 디지털 이주민인 기성세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더욱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적 양극화의 문제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하나 이념적 양극화는 또 다른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로버트 퍼트남(Robert D. Putnam)과 데이비드 캠벨(David E. Campbell) 역시 오늘날은 무종교인과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동시에 증가하는 극단적인 종교적 양극화와 더불어 종교 다원주의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는 1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신의 존재와 종교적인 신념의 필연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세속주의 혹은 무종교적 입장으로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다. 현재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시대가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적 역할을 감당했던 미국이 이제는 가장 큰 선교지로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처음 디자인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화목하는 직분을 주”신 것이다(고후 5: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의 교회되기(doing church)임을 기억하고 그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세상과의 화목을 위해 교회가 단순히 어떤 제도적인 사회복지를 실천하자는 것이 아니다. 루터의 시대에 루터가 관여했던 활동들은 루터의 사회적 영향력이 지금과는 달랐고, 그것은 그 당시의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가 시행해 온 그만큼의 일은 이미 국가의 행정적 주무부서나 전문가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요소다.
교회가 ‘우리들만의 천국’인 울타리를 넘어서 이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괴로움과 외로움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분명한 역할을 고민하고 개발해야 한다. 이미 사회적 단절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식한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담당할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를 신설하고 장관을 임명했다. 이것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한데 외로움과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솔루션을 찾아가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맨스세드(Men’s shed)나 미국에서 시작된 킨포크(kinfolk) 등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운동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봉사는 곧 섬김과 나눔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때, 교회가 섬기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나누는 섬김도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그 범위를 보다 더 확대하여 시민 사회의 공공의 영역에서와 그 구성원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 섬김과 나눔의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또한 교회는 “원수”이며 “죄악”된 세상을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른다고 감히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롬 5:8, 10).
미국의 미시간 주는 4월 10일부로 보다 적극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를 골자로 한 새로운 자택대피 행정명령(Stay-at-Home order)을 시행했다. 그동안 필수적이지 않은 업무에 대한 제한과 가급적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 왔지만, 이제는 친구나 이웃에 대한 방문조차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이웃들과의 개인적 교제까지도 주 정부의 법률로 규제하는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의 사회적 습관을 포함한 모든 일상적인 습관들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기존의 모든 사회적 활동들이 제한되고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전염병의 시기는 교회가 이 테크놀로지를 실험할 수 있는 최고로 적절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기에는 많은 한계와 함정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또한 실제적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교회는 녹화 및 라이브스트리밍 기술 등에 익숙해 져서 사람들 간의 연결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도구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실생활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 어려울 때 화상을 통한 접촉과 소통이 가능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요즘 페이스북에서 국내 성악가들 사이에서 #연주가의퍼포먼스(performance) #힘내라성악가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COVID-19으로 인해 외부 공연이나 연주가 없어서 집 안에 머무는 시간들이 많아진 성악가들이 정식으로 연주복을 입고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올리는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본인의 시행 후에는 3명을 지명하고 지명 받은 그 3인은 24시간 내에 이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각각 3인을 지명하는 방식이다.
그런가 하면 독서문화 확산에 기여하고자 #bookcoverchallenge #7days7covers란 해시태그로 7일 동안 하루에 한 권씩 좋아하는 책의 표지를 올리는 캠페인도 있다. 아무 설명이나 독후감 없이 그저 이미지만 올리는 운동이다. 이런 것들은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근위출성 측색 경화증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이것에 대한 기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2014년 여름에 시작되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었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활동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흥미요소와 함께 사회적 관심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룹이나 개인을 대상으로 한 문자메시지를 활용하는 것은 사용자가 그 그룹이나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누군가의 관심의 대상임을 확인하게 하는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에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카**톡의 소통그룹의 형성은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지며 그렇게 해서 생성된 그룹으로부터 편안한 탈퇴가 쉽지 않은 다소 폭력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전체가 불편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때로는 음성메모를 통한 소통 방식은 단순히 텍스트만을 활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주변에서 이러한 도구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양한 이유로 아직도 이러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연결하려는 전략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고 이러한 분야에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그들에게도 사회적 참여의 기회를 가지도록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과 시도에는 지속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빈도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도 서로가 나누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얼마나 자주 그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전염병의 시기는 두려움에 빠진 이웃을 끝까지 섬기고 돌볼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교회의 선한 영향력은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 바이러스의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빠른 것이 사실이지만 친절을 통한 감화도 그만큼 빨리 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가 사회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불가능하지만, 보다 많은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친절과 돌봄과 배려는 이 순간에 필요하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이러스로 인해 감염된 사람일 수도 있고, 직업을 잃은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매우 깊은 염려와 공포로 인해 정서적으로 매우 우울해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의 친절에 감동하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 위기는 교회에 있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된다.
루터는 그 편지에서 질병에 대한 예방도 강조한다. 집안을 소독하고 청결을 유지하도록 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경우처럼 사회적 거리두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루터는 신앙의 의무도 강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말씀과 성례, 기도를 통해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는 오히려 더욱 그 거리를 가깝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들을 계속해서 활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경험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하박국은 매우 열정적인 시가(詩歌)로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앞에서 그에게 보이셔서 알게 하신 “주께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합 3:2). 그는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주는 주의 일을 이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흥케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후(חַיֵּ֔יהוּ)는 ‘살다,’ ‘살아 있다,’ ‘생명을 유지시키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하야(חָיָה)의 피엘 명령형(Piel Imperative)으로서 ‘살게 하다,’ ‘생명을 가지다,’ ‘생명을 유지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즉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흥은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의 부흥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나타나는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건강과 신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루터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배운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이 독(전염병)을 최선을 다해 억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돌보고 보호하고 간호하여 그것을 불필요하게 노출하지 않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급의 상황에서는 필요한 경우에 우리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충분히 대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하고 또 죽기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 삶에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함으로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교회가 기도의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최적기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어느 교회는 코로나19 문제가 속히 해결되고 환자들과 가족들, 또 그로 인해 촉발된 여러 문제들을 위해 매일 19시(오후 7시)에 합심 기도를 시행했다고 한다.
위기의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지표가 될 것이다. 긴급한 위기의 순간에는 사람들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와 우선순위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결론 - “내가 여기 섰나이다”(Here I Stand)
코로나19는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직장에서는 재택근무, 유연근무의 형태가 늘었고, 학교는 전에 없던 입학과 개학을 연기하고 온라인을 통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개인의 여가 시간에 즐겼던 유흥이나 운동, 친교 등은 최대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WHO은 이 바이러스를 “인류의 적”이라고 했고, 국가마다 시행되는 강제봉쇄 정책은 필수품에 대한 사재기와 사람들과의 교류의 기회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장기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립감이나 소외감을 심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감염자 및 사망자의 수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제적인 수치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창궐했던 흑사병에 대한 루터의 인식과 반응은 오늘날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교회에게 큰 도전과 책임을 안겨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돌보도록 책임을 위탁받은 사람은 끝까지 그 책임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직자들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부여받았으므로 자신의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루터는 또한 병자를 돌보는 것에 대해 의료적인 전문가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까지라도 먹이고 마시우고 영접하고 돌아볼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역할은 자명해 진다(마 25: 44, 45). 그리스도를 돌보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런 과정에서 무조건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보존하는 것과 돌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 사이에서 어느 하나의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권면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생명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 질병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전문적인 의료 조치를 따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루터는 단순히 전염병을 피하는 것이 책임이 없거나 믿음의 없는 행동이 아니라, 그 상황이 그로 하여금 그것이 가능하게 했을 때는 그것마저도 믿음의 행동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루터는 자신의 신앙적 결단에 따라 죽어가는 이웃을 섬겼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첫째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 있다는 사회적 책임의 인식이 필요하다. 교회는 지상의 정부와 영적인 정부 사이에서 두 정부 모두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중재와 매개자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둘째로,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는 마음으로 하는 사회적 역할의 실천의 노력이 필요하다. 선행은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곧 그들 각자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섬김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개인이나 그룹을 배제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기본적 규범을 지키고 정부와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수년 내에 주님의 일이 부흥”되기를 희망하면서 공공의 사회적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확산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대에 화목케 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어진 지금의 상황에서 교회가 보다 밝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확산시키고 보다 깊이 있는 영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1521년 4월, 독일의 황제 카를 5세(Charles V)가 교황의 명령에 따라 보름스(Worms)로 루터를 소환하여 95개조 반박문을 포함한 그의 개혁 의지를 취소하도록 했을 때, 루터는 황제와 귀족 등 240명 앞에서 이를 분명히 거절하면서 “오 나의 주님!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물론 그때 그의 이 말은 근본적으로 그의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의 결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다.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었으므로, 그 사명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충만과 풍족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보고(寶庫)이므로 종국에는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위자들에게”(엡 3:10)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봉사하도록 조직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전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충만하도록 할 분명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교회가 세상의 영향으로 본래의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상을 상실한 채 바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매일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정돈하듯이 교회도 역시 끊임없는 개혁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어떤 것의 창조가 아니라 회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교회의 정체성을 찾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교회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염병의 시대에 현대의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의 바른 교회적인 삶을 살아가며 이 세상을 온전히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히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삶으로 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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