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호남선교 1번지’ 나주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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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혁신도시 가시는 손님 내리세요”
목적지는 다르지만, 일단 내려야 했다. 버스는 터미널도 아닌 도로변에 정차했다. 나주교회(담임 박석봉)에 가려면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경로가 간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마트폰에 깔아놓은 각종 지도앱 덕분에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왠지 모를 정겨운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잠시 졸다보니 나주버스터미널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려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시 지도에 그려진 파란 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을 살짝 지난 시간. 구도심의 길은 한산한 편이었다.
이윽고 눈앞에 너른 공터가 펼쳐졌다. 표지판의 설명에 따르면 유물을 발굴하는 중이었다. 그 옆엔 1910년에 문을 연 곰탕집이 새 단장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십 년의 역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도시’란 캐치프레이즈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자의 눈은 고려시대 유물이나 정부가 인정한 백년가게가 아니라, 유물 발굴터를 가로질러 보이는 110년 된 교회에 고정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 100년 전에 세워져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주교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자는 어느새 구교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은 흐렸지만, 기자의 눈이 환하게 뜨인 것마냥 밝고 선명한 모습이었다. 지붕과 창틀은 근래 새로 올린 듯했다. 세월의 깊이가 덜 느껴진 까닭이다. 아마도 오리지널 지붕은 낡아서 비가 샜을 것이며, 창틀은 나무였을 테니 그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벽돌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오롯한 세월의 기운이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듯했다.
“권태건 기자님이시죠?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박석봉 목사가 어느새 나와 맞이했다. 구교회 한쪽에 목회실이 마련돼 있었다. 안내를 따라 신발을 벗고 실내에 들어서며, 이렇게 역사적인 건물에 있는 목회실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기분은 어떨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어렴풋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취재와 나주교회를 위해 잠시 기도했다. 눈을 뜨자 기자 앞에 시원한 삼육두유가 놓여있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테이블이 사이에 두고 박 목사와 마주 앉았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알게 된 구교회와 여러 여행자의 블로그 포스팅 등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더미 사이를 헤집었다. 이내 두툼한 자료를 기자에게 건넸다.
제일 앞장에 “나주교회 선교 110년사”(1914~2024)라고 적혀 있었다. 선교 110년을 준비하며 박 목사가 직접 수집한 자료였다. △제1부 나주교회의 선교역사 △제2부 110년 나주교회 연혁 △제3부 나주교회 선교 이야기 등 목차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듯했다.
나주교회 역사는 1914년 중엽 조선미션이 교회 개척을 위해 영남지방에서 활동하던 김석영 전도사를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초창기 뜨겁게 헌신했던 한효선 씨 또한 같은 해 3월 제주에서 문서전도인 김종원 씨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재림기별이 전해진 것은 이보다 2년 전의 일이다. <세 천사의 기별> 1912년 1월호에 호남지역에서 문서전도가 펼쳐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4년 나주에 파견된 김석영 전도사 또한 목회자가 되기 전에 문서전도에 몸담았으며, 앞서 살펴본 한효선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주교회는 천막교회로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듯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교회 앞의 유물 발굴터는 매일시장이었다. 큰 우시시장이 위치해 있어 그 고기를 활용하는 곰탕집이 여럿 들어선 것이 나주곰탕의 유래(由來)라고 박 목사가 설명했다. 그는 당시 전라남도의 중심인 나주에서도 가장 왕래가 활발한 시장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음에 감사했다. 아마도 서울로 비유한다면 강남 한가운데 교회가 있는 정도일 것이다.
당시 나주지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리적 이점과 성도들의 선교열이 만든 시너지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박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당시 시장이 그렇게 컸다면 역사적인 자료로서 사진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사진 한쪽에 구교회의 모습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수첩에 메모해 뒀다.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니 1920년에도 천막전도회를 한 것으로 나왔다. “구교회가 건축된 것이 1920년 이후냐?”고 박 목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구교회가 세워진 정확한 시기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번 취재를 통해 조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그사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그가 말했다. “기자님 자료에 등장하는 한효선 씨 3대손을 만나 인터뷰 해보시겠어요? 할아버님께 들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나주교회의 산 증인인시거든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얼른 수첩을 챙기고 나가니 이미 자동차에 시동이 걸려 있었다. 기자가 올라타자 부드럽게 교회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박 목사가 말했다.
“현재 나주교회에는 초창기를 기억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다들 교회를 개척하러 가셨거든요. 이 집사님도 그래서 다른 교회에 출석하세요. 그리고 저녁에 화요예배에 오시면 이야기 들어보실 분들이 계십니다. 일정이 좀 빡빡한데 괜찮으신가요?”
기자는 기뻐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대답했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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